[칼럼 - 한정찬] (시) 비(雨)에 관한 소고(小考)

[한국공공정책신문=최진실 기자] 시인 한정찬의 비(雨)에 관한 소고(小考)


비(雨)에 관한 소고(小考)

  

1. 봄비

 

봄비가

겨울 잔해 씻고

사람들 마음 모아

천지간에

풍경화 그리다

수채화 그리고 있다.

 

예전 시장 가장자리 노점에서

봄비 맞으며 우산 고치시던

그 할아버지는 저세상에서도

우산 살 구멍 보고 계실까.

 

밤새 지척거리며 지친 몸으로

온 누리에 내린 봄비에

큰 보상 덤으로 받은 듯

산천초목은 생기 찾았다.

 

봄비가 옛 추억 호출한다.

황사에 얼룩진 강가에 서면

봄버들 꽃봉오리 벙글 때

생살 터지듯 온정 느낀다.

 

지난밤 하늘의 수많은 잔별은

잠 못 이뤄 밤새 뒤척거렸어도

낮에 암팡스레 내리는 봄비에

감미로운 언어 자아내고 있다.

 

봄비에 찾아온 반가운 모습처럼

장독대 항아리 위로 내리는 봄비.

어머니 눈길처럼 따라 흘러내려

두 눈 감고 잠시 숨 고르고 있다.



2. 여름비

 

기다려온 비가 내렸다.

오래 갈망한 단비다.

온종일 맞아도 참 좋은 비다.

농작물에 생기가 확 돋았다.

 

지루한 장맛비는 우울하지만

가뭄에 내린 여름비는 반갑다.

가슴을 적신 여름비는 생명이다.

모처럼 느낀 행복한 때다.

 

고마운 여름비 흠뻑 맞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괭이 삽 기꺼이 둘러메고

농장에 달려가 살펴본다.

 

여름비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윽한 흙냄새, 풀냄새 잔뜩 품은

향기론 바람 냄새 좋아하던

그 사람 생각이 나 참 좋다.

 

​농장 쉼터에 여름비 방울에

마음의 시간 몽땅 맡겨 본다.

초록에 짙게 물든 영혼의 결은

여름 빗줄기 온통 초록이다.

 

빗줄기 후드득 지나간 뒤로

농작물 부쩍 자라고 있다.

여름비는 반가운 손님이다.

여름비는 마음의 위안이다.

 

먹구름 천둥은

차광막 아래 오케스트라다.

적어도 다만

농장 안 농작물에 있어서는.



3. 가을비

 

반쯤 열린 대문에 보일 듯 말듯이

반쯤 뜬 눈에 가을비 추적 내린다.

더위에 떠밀려온 저 들의 모든 흔적에

고택 입구 하마석은 꾸벅 졸고 있다.

 

홍살문 하나 벗어나면 삶의 체면 버리고

슬픔을 토해내듯 백일홍꽃 활짝 피었다.

본질에 충실하며 본질을 잘 지켜라.

형식은 바꿔도 좋다는 선현 말씀이 있다.

 

처마 밑으로 무덤덤한 가을비 방울에

깜짝 놀란 길손 두 눈 꺼벅거린다.

가을바람 세차게 먹구름 몰고 다니다가

마음 버거운 담장에 가을비는 빗금 친다.

 

가을이 젖는다. 불그스레 하루 내내 적신다.

가을비가 발로 툭툭 바람 걷어차고 있다.

창밖에 가을 빗소리 아무리 쓸쓸히 내려도

가을비에 젖은 농부 정말 즐겁기만 하다.

 

짙게 물든 가을비가 쉼 없이 말 걸어온다.

추억은 그리움 날개 주렁주렁 달았다.

가을비에 마른 가슴 촉촉하게 젖었다.

은혜로운 일이고 갈증 해소하는 일이다.

 

이 가을비가 없으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종일 가을비 내려도 낙엽은 참 조용하다.

가을비에 일그러진 수채화 같은 얼굴들이

몸에 듬뿍 스며 퍼진 건초 향기에 취해있다.

 

떨구어진 낙엽 예민해진 채 떨어진다.

길거리 나선 잔별처럼 낙엽 뒹굴고 있다.

실핏줄 마르고 근육 말라버린 낙엽이

가을비에 젖은 채 날리는 그 쓸쓸함 본다.



4. 겨울비

 

하얀 빈말처럼 소리 없이 일그러진 칠흑에

겨울비 내려 시방(十方)이 삭막해 쓸쓸하다.

이 세상에 별 닮은 별꼴이 참 많은 것은

저 노곤하게 얼어붙은 겨울비 때문이리라.

 

겨울비 내리는 날 곧바로 전화하세요.

아주 오래전 아날로그 버전으로 남았다.

멀리 보이는 하늘처럼 아주 외로운 추억이

잔별처럼 소곤거리다 반짝반짝이고 있다.

 

겨울비 참 그리워한 그 가장자리에는

지난가을에 쌓인 낙엽이 색 바랜 채 있다.

겨울 빗소리는 장송곡을 외롭게 듣고

젖은 낙엽을 밟으며 하염없이 토닥인다.

 

겨울비 흠뻑 맞으면 또 아픔이 도져온다.

겨울에 아주 가버린 사랑 끝 간 도돌이표에

그대 생기 돋는 미소 짓고 올 것만 같아

기대 잔뜩 부풀어 콧노래 불러본다.

 

겨울비 하얀 빈말처럼 내리다 소멸할 때

나뭇가지 끝 대롱거리는 고드름 광채처럼

창천은 별빛 밝은 그때를 또렷이 기억한다.

이미 찾을 수 없는 물 위 윤슬 그리워한다.

 

겨울비 후드득 스쳐 갈 때 뼛속 시려온다.

늑골 아픔 다독거리는 화롯불 지펴본다.

겨울비 봉창 두드릴 때 오래 잊고 살아 온

사람 사람들 모습이 가로등처럼 지나간다.

 

겨울 빗소리 얼은 마음 녹이는 한잔 차(茶)로

적막한 산하 일깨우고 긴 긴 밤 지새운다.

겨울비 늑골에 파고드는 시린 바람

빚진 마음 그 사랑값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한정찬/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한국공공정책신문

 

한정찬

□ 시인·시조시인·동시인

□ 시집 ‘한 줄기 바람(1988)’외 29권, 시전집 2권, 시선집 1권, 소방안전칼럼집 1권 외

□ 농촌문학상, 옥로문학상, 충남펜문학상, 충남문학대상, 충청남도문화상 외


작성 2025.10.17 01:10 수정 2025.10.17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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