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은 평범하지도, 개인적인 일도 아닙니다.

퇴직은 부모나 자식, 배우자의 일이기도

퇴직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우리를 속박

가족(이미지 freepik.com)


초봄이었습니다.
출근길에 듣고 있던 라디오방송에서 소개된 어느 애청자의 사연입니다.
“퇴직한 지 얼마 안 된 청취자입니다.
지금은 집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습니다.
낯선 하루를 표시 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주며 다짐합니다.”

저는 이 사연을 들으면서 마치 그의 가슴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격렬하게 공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초봄부터 퇴직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 된 것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애청자의 가슴속은 블랙홀처럼 초조함, 막막함, 두려움, 불안감, 후회 그리고 약간의 환상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요.
저도 비슷한 감정을 이미 겪고 있는데, 퇴직하고 집에 있는 그의 심정이야 오죽할까요.
그리고 그의 모습이 바로 일 년 후의 내 처지라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가던 길을 돌려 그를 찾아가 함께 울어주고, 가슴에 담아 놓은 습설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도 싶었습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모범적인 퇴직자는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퇴직자의 전형입니다.
그의 감정과 처지는 공감이 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태도까지 공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연은 지금까지 제가 읽고 접했던 ‘퇴직 정보’ 중에서 제일 공감되고, 가장 담백하고 정확하게 핵심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퇴직이라는 실체와 퇴직자의 감정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애청자의 사연에 숨겨진 행간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라는 곳이 없어 집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다 / 경험하지 못한 낯선 하루를 배급받고 있다, 그런데 그 배급을 언제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 / 맨탈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내 삶에 멀미가 난다 / 무기력하게 갈등하고 휘청이는 내 나약한 모습을 가족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 가족과 친구들은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니 실망을 안겨줄 수 없어 / 난 여전히 가장이니까, 난 여전히 슈퍼맨이어야 하니까 /

행간을 읽어본 그대의 소감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까 퇴직과 관련한 사회적 편견이 뿌리 깊게 고착화 되었고, 이 고정관념은 다시 개인을 속박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습니다.

먼저 퇴직은 평범한 사건이 절대 아닙니다.
일 년에 수백만 명이 퇴직한다고 해서 그것이 평범하고 당연한 것으로 낮잡아 보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 오류입니다. 마치 사람은 다 죽으니, 개인의 죽음도 존엄하지 않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퇴직은 개인의 삶을 옮기고 바꾸기까지 해야 하는 매우 세심하고 복잡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삶의 1/3에 해당하는 거대한 시간을 투입했던 조직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포장이사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2/3 정도를 보냈던 인생1막을 떠나 미지의 인생2막으로 내던져지는데, 숏폼을 넘기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아니 대부분의 퇴직자들은 자기감정을 억누르고 숨기려고만 합니다. 왜 그는 이렇게 억지스럽게 감정 처리를 해야만 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퇴직은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이라는 편견이 강한 탓에 ‘유독 나만 티를 내면 나약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거야’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퇴직은 실직과 재취업 사이에 존재하는 일시적 휴식 상태로 보는 지배적 시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서둘러 일자리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철딱서니 없는 퇴행적 행동처럼 보일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퇴직은 경제적, 문화적 충격과 심리적 지진을 동반하는 개인사적 변혁이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시각에서 바라보면, 애청자의 슬픈 감정은 지극히 정상적인 자기표현입니다. 그러니 퇴직예정자든, 퇴직자든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꺼내놓고 솔직하게 반응해야 그것에서 벗어나고, 다시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만약 감정을 계속 억누르면 부정적 투사와 신경증으로 덧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퇴직은 개인적인 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닌데, 개인의 몫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춘기가 가족의 일이고 사회적 관심사이듯, 결혼이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가족의 일이자 제도적 장치이듯이 퇴직 또한 가족의 일이고 정책의 대상입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밖에서 수십 년을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떻게 개인의 일이기만 할까요.
성인이니까 상실감과 소외감,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은 혼자 해결하라며 눈 감아 주는 것이 진정한 배려이고 신뢰인가요.
그가 익숙한 것을 떠나 낮선 미래의 문턱을 넘어가는데, 그것은 오로지 네 몫이라며 어떻게 방관할 수 있나요.
가족과 친구는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동행이 아니었던가요?

물론 퇴직을 비롯한 삶의 과제들은 개인의 문제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퇴직은 아버지(어머니)의 일이기도 하고, 자녀의 문제이기도 하고, 부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퇴직과 관련한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생애발달적 현상들은 퇴직자는 물론이고, 그 가족 모두가 알아야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응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가 가정에서 정착되어야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애청자는 자기감정을 숨기지 않고 가족에게 꺼내 놓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불안은 줄어들고 용기는 늘어나겠고요.
그러니 퇴직을 혼자 감당하려 말고, 가족은 애써 모른 체 하지 말고, 사회는 재취업만 독촉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고,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은 없다는 시구(주)처럼,
흔들리면서 제자리를 찾는 오뚜기처럼,
힘든 시기에 삶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것을 불안해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변화를 욕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퇴직 전후에 감정과 멘탈이 흔들린다면, 중년의 위기감으로 삶에 멀미가 난다면,
그대는 지금 삶의 한 구간을 잘 통과하는 중입니다.
흔들리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주)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인용

"평범한 일상을 덖어 환희를 짓고 싶은" 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 칼럼니스트 김황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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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종 칼럼니스트 기자 yc1401@naver.com
작성 2025.11.03 10:38 수정 2025.11.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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