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박동명] 장수촌은 어디일까?

"장수의 비결은... 지역사회가 건강을 관리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장수는 '병실'이 아닌 '일상'에서 만들어진다.

▲박동명/한국정책연구원 원장 ⓒ한국공공정책신문

 

[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박동명 교수는 전 서울특별시의회 보건복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보건·위생·건강 분야의 정책과 조례, 예산을 현장에서 검토해 왔다. 이번 칼럼에서는 ‘장수촌’의 개념이 자연환경 중심에서 의료·복지·생활 인프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진단하고, 지방정부가 ‘사회적 장수 환경’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정책적 대안을 제시한다.




“예전엔 공기 맑고 물 좋은 시골이 장수촌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한때 우리는 장수의 비밀을 자연에서 찾았다. 배산임수, 맑은 물, 검소한 식습관, 공동체의 정이 오래 사는 힘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여러 농산촌 지역이 ‘100세 마을’로 불리며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장수는 더 이상 자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자연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지역 간 건강지표와 기대수명, 노년기 삶의 질이 엇갈리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핵심은 의료 접근성과 사회적 인프라, 그리고 지역사회가 건강을 관리하는 역량이다. 과거의 장수는 생태적 장수였다. 몸을 쓰는 생활, 제철 식재료, 촘촘한 이웃관계가 자연스럽게 건강을 떠받쳤다. 반면 현대사회는 만성질환이 일상화된 시대다. 고혈압·당뇨 같은 질환은 치료보다 관리가 더 중요하며, 그 성패는 개인 의지보다 시스템의 설계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장수는 개인의 체질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복지·의료·생활환경이 빚어내는 결과로 바뀌고 있다.

 

장수는 '동네'에서 만들어진다


장수는 '병실'이 아닌 '일상'에서 만들어진다. 동네의 길 위에서, 마을의 식탁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보건의료 체계의 접근성 속에서 장수의 기반이 놓인다.

걷기 좋은 보행 환경이 있는가, 고령층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가, 동네 단위의 운동·영양 프로그램이 지속되는가, 건강검진과 1차 의료가 문턱 낮게 제공되는가, 우울과 고립을 줄이는 사회적 연결망이 살아 있는가—이런 요소들이 오래 사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을 가른다.

 

도시 근교의 신흥 주거지나 의료 인프라가 잘 갖춰진 지역에서 노년기 건강지표가 비교적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규칙적으로 걷고,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며, 필요할 때 진료와 처방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의 장수촌은 “공기 좋은 마을”이 아니라 “촘촘한 의료·복지 네트워크가 있는 마을”이다.

 

과거 필자는 서울특별시의회 보건복지 전문위원으로 정책·조례·예산을 검토하면서 이 사실을 수차례 확인했다. 건강은 보건소의 사업 하나로 바뀌지 않는다.

건강은 예산의 우선순위, 조례의 설계, 부서 간 협업, 민간자원 연계, 성과관리 체계가 맞물릴 때 개선된다. 장수촌 논의가 ‘미담’이나 ‘관광 브랜드’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사회적 장수시대’의 정책 대안


그렇다면 정책은 어디에 힘을 주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장수를 개인에게 맡기지 말고, 지역이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당장 추진할 수 있는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상적 건강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보건소 중심의 단발성 프로그램을 넘어, 지역사회 단위의 만성질환 관리·운동·영양·금연·절주·치매 예방을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해야 한다. 핵심은 “등록–추적–환류”다. 고위험군을 등록하고, 생활습관 개선을 지속하며, 건강지표(혈압·혈당·체중·활동량 등)를 통해 효과를 확인하고, 이를 다시 정책에 반영하는 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둘째, 생활환경을 ‘건강하게 늙는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고령층에게 “걸으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걸을 길이 없으면 그 말은 공허하다. 보행 친화적 도로, 안전한 횡단보도, 벤치와 그늘, 작은 공원과 실내 걷기 공간, 무장애(Barrier-Free) 동선 같은 물리적 환경이 장수정책의 기반이다. 건강 공원 조성은 단순 조경사업이 아니라 운동처방, 낙상예방, 걷기동아리, 사회참여 프로그램이 결합된 생활 속 건강 인프라로 설계해야 한다.

 

셋째, 고립과 우울을 줄이는 ‘관계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

장수는 심장과 혈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로움과 고립은 건강을 갉아먹는 숨은 위험요인이다. 경로당·복지관 중심의 전통적 방식만으로는 고령층의 다양해진 삶을 담기 어렵다. 소규모 모임, 세대통합 프로그램, 자원봉사 기반의 방문·동행 서비스, ‘사회적 처방’(의료와 지역 활동·모임·돌봄을 연결하는 방식)을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 영역은 비용 대비 효과가 큰데도 예산 편성이 뒤로 밀리기 쉬운 분야다.

 

넷째, 디지털 의료·복지망을 농촌과 도서지역까지 확장해야 한다.

원격 모니터링, 건강 데이터 기반 맞춤 관리, AI 기반 위험예측 등 스마트 헬스케어는 장수정책의 새로운 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술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고령층의 디지털 격차를 줄이는 교육과 지원, 개인정보 보호, 의료 안전성 확보, 책임소재 정립이 함께 가야 한다. ‘디지털 장수’는 단순한 기기 보급 정책이 아니라, 법·윤리·서비스가 결합된 공공 인프라 구축 과제다.

 

다섯째, 장수정책을 성과관리 체계로 운영해야 한다.

장수정책은 선의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지표와 성과가 있어야 예산이 붙고, 예산이 있어야 지속된다. 기대수명·건강수명, 만성질환 조절률, 보행·낙상 지표, 우울·고립 지표, 1차 의료 접근성, 돌봄 연계율 같은 핵심 지표를 설정하고, 부서별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특히 조례는 선언에 그치지 말고, 실행 주체·협력 구조·재정 근거·평가 규정을 반드시 담아야 한다.

 

장수촌은 ‘정책으로 만드는 마을’이다


장수의 비결은 이제 개인의 체질이 아니라 지역사회가 건강을 관리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과거의 장수촌이 자연의 선물을 누린 곳이었다면, 오늘의 장수촌은 정책으로 만들어지는 마을이다. 물 좋은 시골이 장수촌이라는 낭만을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그 낭만 위에 현대적 시스템을 얹자는 것이다.

 

지방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건강하게 나이 드는 지역을 설계하고, 예산과 조례로 뒷받침하며, 기술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장수촌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은 지리 문제가 아니라 행정과 복지, 그리고 지방자치의 역량을 묻는 질문이 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지역이 곧 우리의 새로운 장수촌이 될 것이다.



박동명

▷법학박사,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전)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서울특별시의회 보건복지 전문위원



작성 2026.02.01 00:05 수정 2026.02.0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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