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가 비추는 로마서 12장 16-21절의 겸손과 원수 사랑을 따라, 보복을 내려놓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복음의 은혜와 화해의 길을 차분히 묵상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는 믿음의 순종과 평화를 오늘의 관계 속에서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한 영혼은
형벌의 차가운 문보다 자비의 따뜻한 손 앞에서 더 깊이 무너진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대개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품는 사랑의 사건이다. 장재형 목사 설교는 로마서 12장
16-21절을 따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한다. 겸손은
낮은 태도의 장식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기기 위해 복음이 우리 안에 세우는 첫 자리다.
이 말씀의 흐름은 선명하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는 권면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어떤 형태를 입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본문을 단지 인간관계의 예절로 읽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이해하는 믿음의 길로 풀어낸다.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복음이 악의 방식에 휘말리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는 은혜의 자리다.
로마서 12장은
감정이 고요할 때만 가능한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오해가 있고, 상처가
있고, 누군가에게 되갚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믿음의 방향을 묻는다. 그래서 이 설교는 단순한 교훈을 넘어, 신앙인의 내면을 오래 비추는
거울이 된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가보다 먼저, 누구
앞에서 스스로 높아지려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는 복음의 은혜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씀은
같은 의견을 가지라는 얕은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의 방향을
말한다.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로 자라려면, 누군가를
위에서 판단하는 습관보다 그의 자리 곁에 서려는 움직임이 먼저 필요하다. 겸손은 자신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형편을 내 시야 안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순종이다.
이 설교가 깊이 있게 짚는 지점은 사랑과 앎의
관계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의 정보를 많이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아픔 아래에 서 보고, 그의 짐을 함께 느끼며, 필요하다면
실제로 손을 내미는 일이다. 그래서 이해는 차가운 분석이 아니라 사랑으로 낮아지는 행위가 된다.
설교는
“understand”라는 말의 이미지를 통해, 이해가 아래에 서는 태도와 이어져 있음을
환기한다.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그를 내 기준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자리 가까이 내려가야 한다. 이것이 낮은 데 처하라는
말씀의 실제적 깊이다. 사랑은 멀리서 해석하는 시선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함께 견디는 마음이다.
빌레몬서의 바울이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에서
보인 태도도 이 흐름 안에 놓인다. 바울은 권위를 앞세워 명령하지 않고, 사랑으로 권면하며 화해의 길을 열었다. 큰 권위를 가진 사람이 낮은
자리에서 간청할 때, 복음은 명령의 언어가 아니라 회복의 언어로 드러난다. 교회 안의 관계가 세워지는 방식도 결국 이 낮아짐을 통과해야 한다.
사랑으로
알 때 지혜가 길을 찾는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는 말씀은 신앙인의
내면을 조용히 찌른다. 사람은 쉽게 자기 판단을 지혜라 부르고, 자기
감정을 정의라 부른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은 참된 지혜가 머리의 빠른 결론보다 사랑의 분별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잠언의 권면처럼 어떤
때는 미련함을 따라 대답하지 않아야 하고, 어떤 때는 그 미련함을 깨우쳐야 한다.
이 두 태도는 서로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랑 안에서는 하나의 길이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선이 어떻게 드러나느냐다. 사랑 없는 지식은
사람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살리지는 못한다. 반대로 사랑에 붙들린 지혜는 말할 때와 침묵할 때, 가까이 갈 때와 기다릴 때를 분별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설교의 지혜는 추상적인 교리
설명보다 삶의 질감을 갖는다. 말 한마디를 늦추고, 판단의
속도를 줄이며, 상대를 위해 기도하는 작은 태도들이 지혜의 실제 얼굴이 된다.
그러므로 복음의 지혜는 논쟁의 승리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방향으로 드러난다. 낮아진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은 더 깊이 알게 된다. 신학적
통찰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볼 때가 아니라, 누군가의 상처 가까이에 무릎을 낮출 때 맑아진다.
이 지혜는 교회 안에서 가장 먼저 시험된다. 공동체는 완성된 사람들이 모인 장소가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마주하는 자리다. 그래서 사랑은 좋은 감정이 오래 지속되는 상태가 아니라,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는 순종이다. 믿음은
그 자리에서 말의 온도와 행동의 방향을 바꾼다.
보복을
내려놓을 때 믿음의 평화가 온다
로마서 12장의
후반부는 겸손의 자리를 원수 사랑의 자리로 밀고 간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은 감정을 억누르라는 정도의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악이 우리
안에서 다시 번식하지 못하게 하라는 복음의 명령이다. 보복은 잠시 정의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순간 우리는 악의 언어를 빌려 악과 닮아가기 쉽다.
본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한다. 선은 우연히 흘러나오는 착한 감정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계획하고 선택하는 순종이다.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은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라, 심판자의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절제다. 하나님이
공의롭게 다스리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상대를 쓰러뜨려야만 평안해진다는 거짓 확신에서 벗어난다.
다윗이 사울을 해할 기회를 얻고도 칼을 들지
않은 장면은 이 믿음을 설명하는 중요한 자리로 제시된다. 그는 눈앞의 기회를 복수의 허락으로 오해하지
않았다. 판단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고백이 그의 손을 멈추게 했다. 이런
믿음에서 오는 평화는 세상의 힘의 균형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설교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구별한다. 힘으로 억누르는 평화는 잠시 갈등을 멈춘 것처럼 보여도 마음의 적의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랑과 섬김에서 오는 평화는 상대를 무너뜨려 얻는 고요가 아니라, 악의
흐름을 끊고 새 관계의 가능성을 여는 고요다. 그 평화는 십자가의 길처럼 약해 보이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사람을 바꾼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소망의 순종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능을 거슬러 흐른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거슬러
흐르는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낸다. 원수를 돌보는 사랑은 악을 모른 척하는 관용이 아니다. 그것은 악이 나를 통해 또 다른 악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막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다.
이때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아니다. 설교의 논리는 오히려 더 엄격하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해서는 내 안의 분노와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수 사랑은 감정의 미화가 아니라,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깊은 훈련이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은 여기서 선명해진다. 악에게 지는 것은 단지 외적으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보복이
내 안의 사랑을 무너뜨리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반대로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
반응을 다스리게 하는 일이다. 그 길에는 용서와 화해가 있고, 때로는
회개의 눈물과 다시 시작하는 작은 순종이 있다.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는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선한 행동은 상대의 양심을 깨워 돌이키게 할 수 있고, 끝내
거부된다면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악을 드러내게 한다. 어느 경우에도 최종 판단의 자리는 우리의 손에
있지 않다. 우리의 몫은 악의 방식에 가담하지 않고, 사랑과
선으로 복음의 현실을 보이는 것이다.
이 길은 빠르고 쉬운 길이 아니다. 성도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미워하지 않기로 결심한 마음이 다시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회개는 실패를 끝으로 만드는 절망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 방향을 돌리는 은혜의 통로다. 한 번의 절제, 한 번의 용서, 한 번의 따뜻한 손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해의
씨앗이 된다.
결국 이 설교가 남기는 소망은 크고 화려한
승리가 아니다. 낮아짐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분별하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의 조용한 능력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기라고 말하지만, 그 이김의 방식은 낮아짐과 사랑과 선함이다. 오늘 우리의 손에 아직 내려놓지 못한 칼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 앞에서 다시 먹이고 마시게 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