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클수록 비례하여 법당에 모셔진 불상도 큽니다.
관광객이 보기에는 경이롭겠지만, 불자인 제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근래에는 동양 최대의 불상이니 천불상, 만불상이라고 광고까지 하는 세태를 보면 괜히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곤 합니다.
대부분 절에는 세 분의 부처님상을 모셔져 있고 드물게는 한 분을 모신 사찰도 있습니다만, 그 크기는 모두 거인처럼 큽니다.
그 위대하지만 거대한 불상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복을 구하는 기도가 전부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찬탄하지만, 부처님이 사람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신적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시아본사(是我本師), 글자 그대로 그분은 저의 스승입니다.
지난 주말에는 춘천 외곽에 있는 제따와나선원에 다녀왔습니다.
선원은 무엇보다도 특이한 사찰 건물로 도드라져 보이는데, 인도의 제따와나와 미란다 대학에서 모티브를 얻고, 건축물이 주재료인 붉은 벽돌도 직접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마야문명 유적지 같다는데, 제가 받은 첫인상은 유럽의 고풍스러운 수도원입니다.
저는 법당 참배를 서두르지 않고 사찰 건물 곳곳을 아주 느리게 감상했습니다.
다음 일정도 없거니와 붉은 벽돌의 색감과 질감, 빈 공간, 선원을 둘러싼 여름나무와 푸른 산, 강바람과 흰 구름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서성이다 이윽고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아!
제가 찾던 법당과 부처님이 거기 말없이 계셨습니다.
차갑지 않은 부드럽지만 단단한 화강암 좌대 위에 수수한 홑겹의 옷을 걸친 근엄하지도 않고 자애롭지도 않은 표정의 부처님이 앉아 있습니다.
원만구족한 수행자가 단정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 수행자를 마주하니 부처님은 처음에도 수행자였고, 지고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서도 수행자였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복을 아낌없이 준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고통과 모순이 싹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순간의 고통을 면하고 복을 받더라도 삶의 울렁거림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악착같이 반복될 테니까요.
언제 어디서 올지도 모르는 복을 기다리는 것도 위태롭고, 수행없이 고통이 사라지길 바라는 일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따와나의 부처님, 수행자인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삶의 울렁거림으로 권태에 빠지거나 고통 받을 때, 그 고통을 마주하고 나처럼 수행하라.
고통을 발효시켜 평온을 만들어라.’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매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삶도 지식이나 의식이 아닌 수행의 과정이어야 쭉정이가 아닌 알곡을 거둘 수 있습니다.
예순 살이 넘어도 아슬아슬 위태롭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수행의 부재’에 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수행이란 소 고삐와 말뚝 사이의 긴장된 거리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대에게 고삐는 무엇이고, 말뚝은 무엇인지요?
K People Focus 김황종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케이피플포커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 시 표기 의무
■ 제보
▷ 전화 : 02-732-3717
▷ 이메일 : ueber35@naver.com
▷ 뉴스홈페이지 : https://www.kpeoplefocu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