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를 따라 성탄의 참뜻과 갈라디아서가 경고하는 다른 복음을 묵상합니다. 오직 믿음과 은혜, 성경으로 돌아갈 때 교회와 신자의 사랑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 살피고, 복음에 인간의 조건을 더하는 순간 무엇을 잃는지도 차분히 되짚습니다.
겨울의 도시가 수천 개의 불빛으로 밝아질수록, 교회의 심장에는 더 깊은 질문 하나가 내려앉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뻐하며 성탄을 기다리는가. 종교개혁은 복음의 잔에 인간의 공로와 전통이 섞였을 때 다시 기록된 말씀으로
돌아가려 했던 역사였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는그 오래된 질문을 성탄의 문 앞에 세우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왜 다른 무엇으로도 보충될 수 없는 완전한 은혜인지를 묻게 한다.
성탄은 한 해의 끝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계절적 분위기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는지, 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지를 다시 고백하는 시간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밝히는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향하는 곳은
믿는 자의 구원과 영생이다. 그러므로 성탄의 빛은 감상을 위한 조명이 아니라, 죄와 사망 가운데 놓인 인간에게 열린 생명의 길을 비추는 빛이다.
성탄의 빛 앞에서 복음의 이유를
묻다
설교의 흐름은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에서 멈추지 않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를 로마서의 메시지와 연결한다. 로마서 5장은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 아래 놓인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길이 열렸음을
보여 준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는 구원의 현실을 드러낸다. 성탄은 바로 이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낮아져 오신 주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왜 예수인가”라는 질문은 곧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교회가 많다는 사실이나 외형이 커졌다는 사실만으로 복음의 능력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왜 구원이며, 그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을 가르치고 사람을 제자로 세우는 사명을 잃는다면, 화려한 성탄의 외형 속에서도 정작 성탄의 주인을 놓칠 수 있다.
설교는 바다와 소금의 비유를 통해 교회의 수와 영향력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돌아보게 한다. 소금이 많아도 짠맛을 잃으면 부패를 막지 못하듯, 교회가 복음의 감격을 잃으면 사회 속 존재감은 커도 생명력은 약해질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첫 과제는 더 많은 것을 보태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음의 맛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그 회복은 프로그램의 증가보다 사랑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이 지점에서 성경 묵상은 지식을 더하는 작업을 넘어선다. 말씀은 우리가 익숙함 속에서 잊어버린 구원의 이유를 다시 일깨우고,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비춘다. 성탄을 진실하게 기념한다는 것은 주님의 탄생을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오심이 오늘 나의 삶을 무엇에서 해방하며 무엇을 향해 부르는지를 듣는 일이다.
물 탄 포도주처럼 은혜가 흐려질
때
이사야서가 보여 주는 물 탄 포도주와 찌끼 낀 은의 이미지는 복음의
변질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본래 충분한 것에 다른 무엇을 섞는 순간,
그 맛과 빛은 흐려진다. 장재형 목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교회가 경계해야 할 위험이 복음을 노골적으로 버리는 데만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복음을 인정하면서도
구원을 위해 인간의 행위와 전통, 규례를 더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미
“다른 복음”의 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를 흔든 가르침은 이방인도 구원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바울이 이를 단호히 거부한 까닭은 하나의 의식을 둘러싼 의견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장의 엄중한 경고는 복음이 인간의 권위나 관습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전통과 질서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예배의 형식과 공동체의 규례는 신앙을 돕고 성도를 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거나,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또 하나의 문턱을 세운다면
본래의 자리를 벗어난다. 교회의 제도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어야지 복음을 대신하는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이 흐려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흐려진다는 뜻이다. 은혜가 조건으로 바뀌면 신자는
받은 사랑에 응답하기보다 자신의 자격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한다. 그때 믿음의 기쁨은 피로로 바뀌고, 공동체의 열정은 형식 속에서 식어 간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잃는 까닭은 활동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라, 활동을 움직이는 사랑의 근원이 희미해졌기 때문일 수 있다.
오직 믿음이 열어 놓은 자유의
문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붙드는 중심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다. 이
고백은 인간의 책임을 지우는 편리한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신앙고백이다.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취를 내세우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원에 자신을 맡기는 순종이다. 믿음은
은혜를 얻어 내는 대가가 아니라 은혜를 받아들이는 열린 손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 믿음이 삶을 얼마나 깊이 바꾸는지를 보여 준다. 신앙은
기존의 삶에 종교적 장식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분 안에서 새롭게
사는 데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이 말하는 자유도 원하는 대로 살아갈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굴레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된 자유다.
개혁신앙은 이 중심으로 계속 돌아가는 태도다. 개혁은 과거의 한 사건을 기념하는 이름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가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살피며 복음에 덧붙인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된다. 교리 교육과 성경 연구가 필요한
이유도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복음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묶는 가르침을
분별하고, 받은 은혜의 선명함을 지키기 위해서다.
말씀을 깊이 아는 일과 사랑이 뜨거워지는 일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설교가 말하듯 믿음은 마음에서 나오며, 그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 신학적 통찰은 사랑을 차갑게 분석하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살린 은혜가 무엇인지 정확히 기억하게 하는 빛이어야 한다. 그때
말씀은 사람을 재단하는 도구가 아니라 거짓을 가르고 생명의 길을 보여 주는 성령의 검이 된다.
식지 않는 사랑이 교회의 소망이
될 때
복음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이들을 정죄할 권리를 얻는 일이
아니다. 바울이 자기 동족을 향해 품었던 사랑처럼, 흐려진
복음 아래 있는 이들이 다시 은혜의 중심으로 돌아오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태도다. 진리를 지키되 사람을
버리지 않고, 오류를 분별하되 회복의 길을 닫지 않는 사랑이 필요하다.
복음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함께 자유에 이르도록 건네는 생명의 소식이다.
교회가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려면 말씀의 칼을 날카롭게 해야 한다. 막연한 열심만으로는 “왜 예수인가”를
묻는 사람에게 소망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성경을 깊이 배우고 복음의 논리를 분명히 붙들
때, 전도와 선교는 익숙한 구호를 넘어 한 사람의 마음을 깨우는 증언이 된다.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같은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까닭은 구원의 근거가 인간의 관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의 출발과 부흥을 판단하는 기준도 건물이나 숫자만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가 어떤 신앙고백 위에 서 있으며, 무엇을
구원의 중심으로 선포하느냐에 있다. 순수한 복음이 뿌리가 되면 자유와 기쁨, 사랑과 선교의 열매가 뒤따르지만, 다른 조건이 섞이면 사람은 다시
두려움과 피로에 묶인다. 교회의 생명력은 규모가 아니라 복음의 선명함에서 나온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성탄의 사랑과 갈라디아서의 경고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한다. 주님이 오신 은혜를 기억하는 일과 그 은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 일은 분리될 수 없다. 성탄을 기념하면서 복음을 의무와 조건으로 가린다면, 우리는 빛을
밝히면서도 그 빛의 근원을 놓치는 셈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붙들 때 교회는 다시 겸손해지고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해진다.
해마다 성탄은 돌아오지만 복음은 반복 속에서 낡지 않는다. 물을 타지 않은 포도주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랑의 깊이는 더욱
또렷해진다. 변질되지 않는 복음은 교회를 크게 보이게 하는 장식이 아니라 교회를 살아 있게 하는
심장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믿음 한가운데에서
복음은 여전히 값없이 받은 선물로 빛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덧붙인 조건들 아래 조용히 그 숨을
잃어 가고 있는가?
장재형목사 공식 홈페이지 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 설교 동영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