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를 바탕으로 사도행전 4장의 부활의 도, 성령의 담대함, 초대교회 공동체의 사랑을 따라 오늘 교회가 붙들어야 할 복음과 소망을 깊이 묵상합니다. 위협 앞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말한 믿음의 길을 차분히 살핍니다.
미완의 대리석 앞에 서면, 아직 돌 속에 갇힌 몸이 빛을 향해 밀려 나오는 듯한 침묵을 만난다.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들이 주는 그 긴장은 사도행전 4장의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을 하나님이 머릿돌로 세우시는 순간, 죽음의 판결은
생명의 시작으로 뒤집힌다. 사도행전 4장을 따라가는 장재형목사(미국 Olivet
University 설립)의 설교는 바로 그 자리, 부활의
도가 교회를 낳고 성령의 담대함이 공동체를 세우는 자리로 독자를 이끈다.
버려진
돌에서 피어나는 부활의 복음
사도행전 4장은
평온한 종교 담론이 아니라 격렬한 충돌의 한복판에서 열린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켰고, 그 사건은 예루살렘 한복판에 감출 수 없는 증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설교가 붙드는 중심은 기적의 놀라움이 아니라 그 기적이 가리키는 부활의 복음이다. 치유는 예수의 이름이 여전히 살아 역사한다는 표지였고, 부활은 초대교회를
움직인 가장 깊은 생명의 근원이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붙잡은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그들이 견디지
못한 것은 새로운 종교 운동의 성장만이 아니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였다. 부활을 부정하던 확신은 흔들렸고, 성전 중심의 권위도 도전을 받았다. 그럼에도 말씀을 들은 이들 가운데
믿는 사람이 늘어 남자의 수만 오천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복음이 억압보다 깊고 빠르게 번져 갔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 설교가 비추는 핵심은 분명하다.
교회는 세상의 승인이나 종교적 체면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 세워졌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고백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 인간이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이름을 가리킨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선언은 하나님이 인간의 판단을 넘어 구원의 질서를 새롭게 세우신다는 신학적 통찰이다.
이 지점에서 초대교회의 형성은 단순한 집단의
탄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서의 시작으로 읽힌다. 사람들은 예수를 실패한 자처럼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이름을 구원의 중심에 두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처음
붙든 것은 윤리적 교훈만도, 조직의 힘도 아니었다. 교회의
뿌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그 이름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가 새롭게
열렸다는 복음이었다.
위협
앞에서 믿음은 더 맑아진다
공회는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은 단순한 법적 심문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다시 공적
자리에서 지워 버리려는 압박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자격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했을 뿐이다.
이 장면은 성경 묵상의 자리에서 오늘의 교회에도
날카로운 거울이 된다. 종교가 권력화될 때, 진리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오히려 생명의 길을 막을 수 있다. 설교의 흐름은 예수의 십자가에 세속 권력만이 아니라 종교
권력의 책임도 얽혀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회개는 세상만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교회 안에 숨어 있는 두려움과 자기 보존의 욕망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일이다.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은 담대하지만 거칠지 않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말에는 논쟁에서
이기려는 오만이 아니라 목격자의 정직이 담겨 있다. 믿음은 만들어 낸 확신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부활
사건 앞에서 침묵할 수 없게 된 마음의 순종이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부활 신앙도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의 생명력이 된다. 복음을
줄이면 갈등은 잠시 줄어들 수 있지만, 교회는 자기 뿌리를 잃는다.
초대교회는 반대가 없어서 담대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심문과 위협, 감금의 가능성이 선명했기에 그들의 믿음은 더
맑게 드러났다. 복음은 안전한 환경에서만 들려야 할 사상이 아니라, 죽음을
이긴 이름이기에 위협 앞에서도 말해질 수 있었다. 이 설교는 그 담대함을 무모한 용기가 아니라 부활을
실제로 믿는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순종으로 읽게 한다.
성령의
진동 속에서 사랑이 공동체가 되다
풀려난 사도들이 향한 곳은 은신처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였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전한 뒤,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기도는 먼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를 고백하는 데서 시작된다. 위협이
실제였지만, 그 위협이 마지막 권세는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시편 2편의 언어로 열방의 분노와 권세자들의 모의조차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고백했다. 이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를 향한 적대가
말씀 안에서 이미 해석되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들은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크게 보았다. 소망은 위험이 사라진 자리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이 위협보다
깊다는 믿음 안에서 소망은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초대교회는 고난을 없애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협을 굽어보아 달라고 구하면서도,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요청은 복음의 길을 멈추지 않겠다는 믿음의 언어였다. 기도의
응답으로 모인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는 장면은, 교회가 두려움의 압력보다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움직이는 공동체임을 보여 준다.
성령의 역사는 말의 담대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사도행전 4장 후반의 교회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며, 기도와 찬양 속에서 사랑을 구체화한다. 부활 신앙은 교리 문장으로만 남을 때 희미해지지만, 서로의 필요를
돌보는 삶이 될 때 선명해진다. 은혜는 선포되는 만큼 나누어져야 하고,
복음은 말해지는 만큼 몸으로 살아져야 한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부활이 실체화된 공동체로 보인다. 성령 충만은 개인의 감정에 갇히지 않고, 말씀의 담대함과 사랑의 질서와 나눔의 습관으로 드러난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표지는 외형의 과시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약한 이를 세우며, 세상의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생명을 더 실제로 여기는 태도다.
오늘
교회를 깨우는 조용한 회개와 소망
사도행전 4장은
오래된 영웅담이 아니라 오늘 교회의 얼굴을 비추는 말씀의 거울이다. 세상은 여전히 예수의 유일성과 부활의
실제성을 불편해할 수 있고, 교회 안에도 권위와 명예와 재산의 유혹이 스며들 수 있다. 설교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다음 장면까지 시야에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외부의
핍박만이 교회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거짓과 탐심도 공동체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오늘 교회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강한
제도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부활 신앙이 실제의 능력으로 살아 있는가이다. 교회가 예수의 이름을 중심에서 밀어내면 아무리 많은 활동을 해도 세상의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반대로 부활의 복음이 중심에 살아 있으면, 연약한 사람들의 모임도
성령의 바람을 타고 세상을 향해 열린 증언이 된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가 오늘의 신자에게 주는 울림은 바로 이 본질의 회복에 있다.
부활은
교회의 뿌리이고, 성령은 교회의 생명이며, 복음은 교회의
사명이다. 이
한 문장은 사도행전 4장의 흐름을 붙드는 중심축처럼 들린다. 교회가
이 고백을 잃으면 세상의 조직과 닮아 가지만, 이 고백을 회복하면 연약한 공동체도 다시 담대해진다. 신앙의 깊이는 위협이 사라진 뒤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위협 속에서도
무엇을 붙들고 누구의 이름으로 서는가에서 드러난다.
오늘 우리의 일상에도 작은 공회가 있다. 예수의 이름을 사적인 위안으로만 가두려는 분위기, 복음보다 안전을
먼저 계산하는 습관, 사랑보다 체면을 앞세우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부활의 도를 믿는 사람은 버려진 돌처럼 보이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시는 머릿돌을 바라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해 침묵하고 있으며, 어떤 은혜를 다시 붙들어야 담대히 사랑할 수 있는가.
장재형목사 공식 홈페이지 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 설교 동영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