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를 따라 로마서 8장의 정죄 없음과 하나님의 자녀 된 은혜를 묵상합니다. 죄와 싸우는 믿음이 성령 안의 회개와 순종을 지나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광의 소망으로 이어지는 복음의 길을 깊이 살펴봅니다.
새벽이 오기 전, 카프카의 『심판』 속 인간은 죄목조차 알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법정의 그늘을 걷는다. 우리 역시 실패한 날이면 마음속 법정에 자신을 세우고, 이미 끝난
판결을 되풀이하듯 스스로를 정죄한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설교가 붙드는 로마서 8장은
그 어둠 한가운데서 전혀 다른 음성을 들려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의 선언이다.
이 선언은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다. 오히려 죄와 싸우다 넘어지는 사람에게, 구원의 토대가
자신의 완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은혜에 있음을 가르친다. 로마서 7장의 탄식 뒤에 8장의 “그러므로”가 놓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믿음의 삶은 실패가 없는 삶이 아니라, 실패가 마지막 판결이 되지 못하도록 복음을 붙드는 삶이다.
정죄의
밤을 가르는 복음의 새벽
사람은 죄를 깨달을 때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하나는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포기한 채 정죄의 어둠 속에 머무는 길이다. 바울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면서도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자신의 모순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탄식은 절망으로 닫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새로운 판결로 이어진다.
특히 바울이
“그러나”가 아니라 “그러므로”로 로마서 8장을 여는 대목은 깊은 신학적 통찰을 품고 있다. 앞선 실패를 지운 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이미 주어진 구원의 토대를 기억하라는 뜻이다. 복음은 인간의 모순을 우회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에 은혜의 확실성을 세운다. 성화는 불안한 자기 증명의 과정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사랑에 응답하는 긴 순종이 된다.
“이제” 정죄함이 없다는 말에는
지속되는 은혜의 시간이 담겨 있다. 처음 믿던 순간에만 유효한 선언이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에서 죄와 싸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을 붙드는 진리다.
정죄 없음은 성화를 취소하는 말이 아니라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사람은 죄를 감추지 않고 빛 가운데 내어놓을 수 있으며, 자신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바라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막연한 종교 감정이
아니라 사랑의 연합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는 말씀은 인간의 결심이 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율법이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이루지 못한 일을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이루셨다. 은혜는
죄를 모른 척하지 않지만, 죄가 한 사람의 이름 전체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성령의
숨결이 옛 삶을 밀어낼 때
로마서 8장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선명하게 마주 세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으로 기울지만 성령을 따르는 생각은
생명과 평안으로 향한다. 여기서 육신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된 본성을 가리킨다. 신앙의 싸움은 외형을 다듬는 데 머무르지 않고, 무엇이 마음을 지배하도록
내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내면의 순종으로 깊어진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은 성화의 방식까지 보여준다. 죄의 습관은 자기수양이나 의지의 과시만으로 끊어지지 않으며,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죄에 대한 두려움과 정죄감 때문에 무기력해지기보다 성령 안에서 담대히 싸워야 한다는 말씀의 흐름을
강조한다. 회개는 구원을 다시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이미
은혜 안에 선 사람이 옛길에서 돌아서는 응답이다.
정죄감과 회개는 모두 죄를 바라보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람을 이끈다. 정죄감은 “너는 끝났다”고 속삭이며 하나님에게서 숨게 하지만, 성령이 일으키는 회개는 죄를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아버지께 돌아가게 한다. 그래서 참된 회개는 자신을 미워하는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말을 거는 기도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복음의 빛을 향해 방향을 돌리는 사람이 변화의 길 위에 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언젠가 도달할 먼 이상이
아니라 지금 신자의 삶을 움직이는 실제다. 죄로 인해 죽을 몸도 살리실 성령이 안에 거하시기에, 현재의 연약함은 미래의 패배를 확정하지 못한다. 신자는 유혹이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 유혹을 주인으로 섬길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이 자유 속에서 사랑은 순종이 되고, 순종은 다시 생명과 평안의 길을 연다.
두려움의
종에서 사랑받는 자녀로
복음은 죄 사함에서 멈추지 않고 신분의 변화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다시 두려움에 매인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 구원은 형벌을 피하는 사건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부를 수 없던 사람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관계의 회복이다. 이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얻은 가장 깊은 자유 가운데 하나다.
설교가 설명하는 양자됨의 이미지는 이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새 가문에 받아들여진 아들이 이전의 빚과 권리에서 벗어나 친자와 같은 자리를 얻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사망에 속했던 옛 신분에서 옮겨진다. 이
변화의 증인은 흔들리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기에, 믿음은 기분이 밝은 날에만 유지되는 자기 확신이 아니다.
자녀라는 이름에는 특권과 책임이 함께 놓여
있다.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지만, 영광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하도록 부름받는다. “아빠 아버지”라는
부름은 삶이 안전할 때만 가능한 안도의 말이 아니다. 가장 무거운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순종하게
하는 사랑의 언어다.
이 정체성은 일상의 선택에도 스며든다. 두려움이 앞설 때 종처럼 대가를 계산할 것인지, 자녀처럼 아버지의
뜻을 신뢰할 것인지가 삶의 방향을 가른다. 사랑받는다는 확신은 무모함이 아니라 책임 있는 순종을 낳고, 상속의 약속은 현재를 가볍게 소비하지 않게 한다. 자녀는 유업을
기다리면서 오늘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 간다.
종의 마음은 작은 실패에도 관계가 끊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자녀의 믿음은 징계와 시련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잃지 않는다. 이 설교가 정죄 없음과 자녀 됨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용서받았다는 확신은 우리를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갈 용기를
준다.
고난의
그늘 끝에 열리는 소망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현실의 고난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으며, 삶의 시련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더 깊이 묻게 된다. 그러나 고난은
더 이상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성령 안에서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과정이 된다.
그렇기에 고난을 미화할 필요도, 고난 앞에서 강한 척할 필요도 없다. 로마서 8장의 소망은 눈물을 부정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탄식 가운데서도
성령의 증언이 멈추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지금의 아픔이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을 때, 신자는 상처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상처에 자신의 미래를 넘겨주지 않는다. 소망은
현실을 외면하는 시선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완성을 바라보는 인내다.
말씀의 흐름은 칭의와 성화와 영화가 서로 떨어진
조각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지금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가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소망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연약함은 구원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완성을 향해 걷고 있다는 표지다. 복음의
기쁨은 상처가 없는 삶이 아니라, 상처보다 깊은 사랑 안에서 다시 걸을 수 있는 자유다.
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은 결국 자신감보다 더 깊은 정체성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나는 죄가 없어서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기에 죄와 싸울 수 있고, 고난이 가벼워서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흔들리지 않기에 기다릴 수 있다. 정죄 없음의 은혜는 오늘도 우리를 회개와 순종의 자리로 부른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실패를 붙들고 마음속 법정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아빠
아버지”를 부르며 다시 생명과 평안의 길로 발을 내딛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