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가 전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따라, 영원을 준비하는 믿음이 재물과 말씀과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는 삶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묵상합니다. 문 앞의 고통을 외면한 부자의 결말과, 이미 주어진 말씀 앞에서 지금 회개하고 순종해야 할 이유를 살핍니다.
한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날마다 잔치를 누렸고 다른 한 사람은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기다렸다.
둘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그 사이에는 끝내 건너지 못한 마음의 간격이 놓여 있었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서 한 인간이 문 앞에 머문다면, 누가복음 16장에서는 문 안의 부자가 문 앞의 인간을 끝내 보지 못한다. 장재형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닫힌 시선을 통해 영원을 잃게 하는 무감각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지를 묻는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부유함 자체를 정죄하거나
가난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설교가 붙드는 핵심은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과 말씀과
기회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그리고 문 앞의 고통을 사랑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는가에 있다. 복음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하지만, 그 영원은 현재를 비워 내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 무엇을 보고 누구에게 문을 열 것인지 더 엄중하게 묻는다.
닫힌
문 앞에서 복음은 우리의 눈을 묻는다
누가복음
16장의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한 흐름 안에 놓여 있다. 앞의
비유가 맡겨진 재물과 유한한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묻는다면, 뒤의 비유는 그것을 자기만족에 소비한
삶의 끝을 보여준다. 우리가 가진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소유가 아니라 맡겨진 것이며, 청지기의 지혜는 남은 시간과 재물을 다가올 때를 위해 선용하는 데서 드러난다.
옳지 않은 청지기가 칭찬받은 까닭은 그의 부정함이
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끝날 수 있음을 깨닫고, 남은 기회를 다가올 때를 준비하는 데 사용했다. 이 장면은 삶이
무한히 계속될 것처럼 소유를 움켜쥐는 태도와 정반대의 지혜를 비춘다. 시간과 재물과 기회에는 결산이
있으며, 청지기의 믿음은 그 사실을 잊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부자가 책망받은 까닭도 단지 풍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 날마다 이어지는 잔치가 그의
눈을 가려 문 앞의 나사로를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움을 줄 능력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고통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물질보다
더 깊은 문제는 마음의 문이 닫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부자는 음부에 간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말씀은 소유의 크기보다 소유를 대하는 마음, 맡겨진 자리에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했는지를 묻는다. 부자의 죄는
풍요 그 자체가 아니라 풍요를 자기 잔치에 가두고, 바로 곁의 사람에게 흘려보내지 않은 데 있었다. 성경 묵상은 여기서 타인의 운명을 판단하는 일을 멈추고, 내가 외면해
온 문 앞을 바라보게 한다.
맡겨진
부요가 은혜의 길이 될 때
장재형 목사는 이 설교에서 부요함의 뜻을 물질에만 가두지 않는다. 말씀과 신학적 지식, 예배의 환경,
설교를 들을 기회와 신앙의 자유를 많이 누리는 사람도 영적으로는 부자일 수 있다. 그러나
받은 은혜가 자기 위안과 자기 공동체의 만족 안에서만 맴돈다면, 풍성함은 생명을 살리는 강물이 아니라
높은 담장이 된다. 많이 받았다는 사실은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더 넓게 나눌 책임의 시작이다.
영적 자기중심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탐욕보다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다. 풍성한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자신의 안정과 확신을 위해서만 소비하면, 신앙은 깊어지는 듯 보이면서도 이웃에게는 아무 열매를 건네지 못한다. 복음과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저장할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더 멀리 흘려보낼 사명을 받았다는 뜻이다. 신학적 통찰 역시 누군가를 높이는 사랑과 순종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생명의 언어가 된다.
그러므로 나눔은 남은 것을 던져 주는 시혜가
아니다. 물질적으로 굶주린 이를 돌보는 일과 더불어, 말씀에
목마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배우도록 돕고 다시 다른 이를 섬길 수 있도록 세우는 일까지 포함한다. 설교가
기독교 서적을 모아 필요한 곳에 보내는 수고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 한 권의 책은 누군가에게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영적 양식이 부족한 이에게는 닫혀 있던 길을 여는 손길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가진 풍성함도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자료와 가르침과 교제의 기회가 충분한 곳에서 그것을 반복해 소비하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한 권의 책과 한 번의 가르침을 기다리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잠시 결핍을 덮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이 말씀을 배우고 회복되어 다시
누군가를 섬길 수 있도록 곁을 내어 준다. 받은 것을 나누어 또 다른 섬김의 사람을 세우는 것이 지혜로운
청지기의 긴 호흡이다.
은혜는
소유되는 순간보다 흘러가는 순간에 그 본래의 빛을 드러낸다. 믿음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는가로만 측정되지 않고, 들은 말씀이 누구의 굶주림을 덜어 주었는가에서 시험받는다. 사랑은
마음속의 따뜻함에 머물지 않고 시간과 재물, 지식과 혀를 움직여 한 사람의 삶에 닿는다. 순종은 거창한 결심보다 내 곁의 필요를 더 이상 남의 일로 미루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표적보다
가까운 말씀, 회개는 오늘 시작된다
고통 속의 부자는 나사로를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죽은 자가 살아오는 극적인 사건조차 굳어진 마음을 자동으로 돌이키지 못한다.
참된 회개는 새로운 표적을 기다리는 데서가 아니라, 이미 가까이 주어진 말씀을 듣고 지금
방향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이 대목은 믿음의 핑계를 조용히 벗겨 낸다. 우리는 때때로 더 분명한 증거, 더 강렬한 체험, 더 특별한 계기가 오면 순종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은 이미
충분히 가까이 와 있고, 미뤄 둔 사랑의 책임 또한 이미 눈앞에 놓여 있다. 부족한 것은 빛이 아니라 그 빛 앞에서 자신을 열려는 마음일 수 있다.
부자가 물 한 방울로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지상에서 그의 혀는 나사로를 부르는 따뜻한 말도, 그를 돕도록 지시하는 말도 내놓지 않았다. 사람을 살릴 수 있었던
혀가 침묵한 뒤, 그는 자신의 혀를 위한 자비를 구한다. 회개는
마음의 후회만이 아니라, 지금 내 말이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에게 복음을 건네며 누구를 실제로 돕게 하는지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죽음 뒤에는 두 자리 사이의 큰 구렁을 건널
수 없었다. 그 단절은 삶의 끝에서 갑자기 생겨난 낯선 운명이라기보다,
날마다 미뤄 온 순종과 끝내 열지 않은 마음의 문이 굳어진 결과처럼 다가온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자신의 집착을 풀며, 외면했던
이웃에게 다가갈 때는 살아 있는 지금이다. 오늘 회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두려움 이전에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은혜다.
영원을
믿는 사람은 오늘 문을 연다
부자와 나사로의 자리가 뒤바뀌는 결말은 이
땅의 형편이 하나님의 최종 판단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사로의 고난이 영원하지 않았듯 부자의 잔치도 영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올바르게 판단하신다는 소망은 고통받는 이를 붙들고, 풍족한 이를 겸손하게 한다. 영원을 믿는 사람은 현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오늘의 선택에 더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이 소망은 선한 수고가 눈앞의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복음으로 한 영혼을 돕고, 말씀으로
세우며, 물질과 시간을 나누는 일은 세상의 계산 안에서 작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수고를 잊지 않으신다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늘의 보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땅의 고통에 무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오래 견디며 곁을 지킨다.
장재형 목사 설교의 긴박함은 공포를 조장하는 데 있지 않고, 아직 문을 열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굳은 마음을 돌이킬
때는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이다. 오늘은 결산 전의 시간이며,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남겨진 소망이다. 영원을 향한 믿음은 현실을 떠나는 시선이 아니라, 현실 속 한 사람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시선이다.
영원을
준비한다는 것은 오늘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오늘 내 앞에 놓인 사랑의 책임을 더 늦기 전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는
받은 재물과 말씀과 재능을 자기 잔치의 장식으로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살리는 통로로 내어놓고
있는가. 지금 내 문밖에는 누구의 기다림이 오래 쌓여 있으며, 나는
그 문을 언제 열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