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탓도 있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미뤘던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주방 우측에서 좌측방향으로 차차 진행하고 있습니다.
9년 전 이사 온 후 한 번도 손이 닿지 않은 컴컴한 공간, 필요한 물건을 찾을 때마다 뭐가 담겨있는지 모를 양념병들을 지나쳐서 길게 손을 뻗었을 뿐입니다. 그리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새로 사들여 싱크대 우측 하부장 입구를 채웠습니다. 그 뒤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말입니다.
동생이 가져다준 오래된 국간장, 친구가 첫 농사라며 들뜬 손으로 안겨줬던 결명자, 그리고 해외여행 다녀오면서 사 왔다고 지인이 건네준 맑은 빛의 발사믹 식초를 뭔지 몰라 반쯤 흘려버리다가 알아채기도, 3년 전 유기농 매장 자연드림에서 회원가입 전 한 달간 회원가로 구입할 수 있다 해서 위기의 순간에 사재기하듯 한 꾸러미 쟁여놓은 보리차, 옥수수차, 간장, 식초등 그 외의 양념들이 진득하니 병뚜껑에도 달라붙어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공간이 하부장에서도 이럴진대 하물며 집은 말해 뭐 하겠습니까.
워낙 수평으로 늘어놓고 눈에 보이는 대로 찾아 쓰는 편이라 뭘 어떻게 어디에 둘지 몰라 유튜브 살림꾼들의 정리비법을 보며 따라 했습니다.
쓸 것만 남기고 그것들의 제자리를 사용자의 동선을 기준으로 잡아주고 흐트러뜨리지 않기로 요약되는데요.
앞으로 쓸거라 예상되는, 과거에 추억이 깃들어 있는, 아끼지만 지금은 손이 가지 않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라는 겁니다. 물건을 정리하면서도 ‘내’ 삶의 주인은 ‘나’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얻는데요. 그 공간을 닦고 그 물건을 집는 순간 그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양념통이 있는 하부장을 정리하니 양념만이 아니라 상부장에 있어 꺼낼 때마다 버거웠던 밥그릇과 국그릇, 작은 접시까지 수납할 공간이 생겼습니다.
싱크대 아래 하부장은 공간이 워낙 협소하고 습기가 있는 곳이라 활용도가 떨어지는 곳인데 유독 잡다한 것들이 뒤섞여있습니다. 수납바구니 3개에 종류별로 쓸어 담으니 속이 시원하고 편안해집니다.
상부장은 의자를 딛고 올라가야 하는 곳이라 그나마 손이 수월하게 닿는 곳을 제외하곤 가끔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유 있게 정리했습니다.
다음은 다용도실. 한쪽 끈만 못에 걸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큰 쇼핑백에 중간께를 느슨하게 매듭지어 쑤셔놓은 비닐봉지, 종량제 봉투, 쇼핑백등 찾아 쓰기도 힘들게 한데 모여 덩어리져 있습니다. 모두 꺼내 바닥에 늘어놓고 작은 쇼핑백 3개를 접어 크기 별로 정리했습니다.
플라스틱 반찬통, 빈 유리병, 유통기간이 지난 영양제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버리면서 그 물건을 집에 들일 때의 마음을 살피니 재고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구입했구나 싶습니다. 좀 더 신중해야겠지요.
뭐 하나 꺼내려면 와르르 쏟아지는 냉동고의 정체불명의 음식들을 사각바구니를 이용해서 정리하니 버릴 것이 절반입니다. 칸마다 뭐가 있는지 메모해서 냉동고 문에 붙여놓고 마무리합니다.
다음은 식기세척기.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를 해주지만 그 식기세척기는 제가 청소해야 합니다. 7년 묵은 때를 반나절이나 매달려 벗겼습니다. 그동안 설거지 해준 값을 톡톡히 받아간 셈이지요. 다시 선택하라면 집에 들이지 않을 물건입니다. 관리 유지하는 품이 적지 않게 들어가니 말입니다.
에어컨, 공기 청정기, 선풍기는 더 심각한데요.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쐬려다가 모아진 먼지를 한 번에 들이마셨나 싶게 먼지 범벅입니다. 부품들을 깨끗하게 씻어 햇볕에 말렸습니다.
보름째 청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반려견이 위독해지면서 녀석이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청소하면서 불안감을 떨치려 한 건데요.
녀석을 보내고 돌아와서도 계속 이어진 청소입니다. 슬픔이 잦아들 때까지 걸레를 놓지 않을 듯합니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좋은 게 있고 좋은 상황에서도 안 좋은 게 있다더니 녀석을 보내고 모두 제자리가 있음을, 더불어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는 의미를 알아가니 이럴 때 하는 말인가요.
녀석도 제자리로 돌아갔겠지요. 저도 제자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독자님 아침 바람이 달라졌습니다. 좀 더 건조해지고 시원한기가 있는데요. 제자리에서 이 여름 잘 버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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