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세월 산업화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던 지역 입장에서, 수백조 원대의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과 향후 10년간 1,000조 원대 투자 구상은 가슴 떨리는 뉴스일 수밖에 없다. ‘지방시대’를 향한 정부의 의지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의 거대한 결단이 만난 이번 발표에 호남 전체가 들썩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정서적 반응이다. 광주 군공항 부지라는 거대한 첨단산업 거점이 제시되었고, 전력과 용수 등 핵심 인프라 마련을 위한 논의가 시작된 지금, 지역사회가 거는 기대는 정당하고 마땅하다. 하지만 환호 현수막이 내걸린 자리에 이제 냉정한 현실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지역사회는 이 거대한 기회를 받아안고 실행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기업의 투자 결정을 움직이는 것은 뜨거운 정서나 정치적 당위가 아닌, 철저하고 차가운 '함수의 계산'이다. 반도체 팹(Fab) 입지는 단순히 땅을 내어주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부지 확보 위에 6.3GW 규모의 대규모 전력망 구축, 하루 65만 톤의 산업용수 확보, 고급 반도체 인재의 안정적 공급, 그리고 패스트트랙 인허가가 탑재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는 ‘타임라인의 정교함’이다. 언제 전력과 용수를 끌어오고 부지를 넘겨줄 수 있는지, 이 타임라인 중 단 하나만 어긋나도 기업의 계산기는 완전히 다른 답을 내놓는다.
안타깝게도 현재 호남 내부에서 목격되는 모습은 이 함수를 채워나가는 속도전과 거리가 멀다. 거대한 기회 앞에서 정작 지역 내부는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라는 소지역주의와 이해관계의 덫에 걸려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이름 하나, 청사 위치 하나, 의대 소재지 하나를 결정하는 일조차 이토록 긴 진통과 분열이 필요했다. 통합 자치단체의 주 청사 위치를 나눠 쓰는 방식은 갈등을 미봉책으로 덮었을 뿐, 향후 실질적 권한과 기관 배치를 둘러싼 대립의 불씨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반도체 팹 부지로 확정된 광주 군공항 이전 절차 역시 한미 간 협의 과제와 지자체 간 잡음, 소지역주의에 발목을 잡혀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여야 정치권마저 1,000조 원대 투자 구상을 국가 균형발전의 모멘텀으로 삼기보다 "기업 압박"과 "정치 공세"라는 상호 비난의 소재로만 소비하고 있다. 1년 8개월 만에 최종 결렬된 국립의대 신설 협상은 이러한 합의 실패 패턴의 상징적인 단면이다. 사안의 본질을 떠나, 지역 내부의 상반된 이해관계를 스스로 조정해내지 못하고 결국 판을 깨버리는 오래된 잔상이 또다시 반복된 것이다. 이 작은 사안들 앞에서조차 무기력했던 지역사회가, 수백조 원이 얽힌 인프라 협상과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를 과연 기업이 정한 엄정한 시한 내에 매끄럽게 풀어낼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지금 호남을 둘러싼 시간은 결코 지역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서로 다른 속도로 돌아가는 '세 개의 시계'가 호남의 자각과 결단을 압박하고 있다. 첫째는 정부의 시계다. 현 정부 임기 내 착공이라는 정책적 목표는 유한한 시간표 위에 올려져 있으며, 정권의 시한이 지나면 정책의 우선순위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둘째는 기업의 시계다. 용수·전력·부지 확보가 단 한 달만 지연되어도 기업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손실로 이어진다. 이미 거대한 생태계를 갖춘 수도권 용인·평택이라는 확실한 대체재가 존재하는 한, 속도전을 놓친 호남에 기업이 리스크를 무릅쓰고 머물 이유는 없다. 셋째는 글로벌 시장의 시계다. 지금은 AI 붐으로 첨단 메모리 수요가 뜨겁지만, 반도체 산업은 본래 경기순환 사이클의 변동성이 극심하다. 지금의 훈풍이 실제 착공 시점까지 유지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정부 역시 발표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전력망 확충, 용수 공급, 군공항 이전의 국가적 중재 등 중앙부처의 칸막이를 허무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판을 깔아준 정부보다 먼저 움직여야 할 곳은 결국 호남이다. 정부가 입지를 정해줄 수는 있어도, 지역 내부의 갈등과 이해관계까지 대신 조정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광주가 제조와 AI를 맡고, 전남이 에너지·소재·연구개발을 분담하며 호남 전체의 산업생태계를 키우는 '결정의 최대화'로 사고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 지역에 팹을 달라"는 유치 경쟁을 넘어, "호남 전체의 반도체 생태계를 어떻게 완결 지을 것인가"에 대한 속도감 있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군공항 이전 논의에 보낸 십수 년의 세월, 청사 하나를 두고 미뤄둔 결론들, 결렬로 끝난 의대 협상의 기록은 결코 낙관적인 신호를 주지 않는다. 내부 갈등으로 허송세월하다 기업이 조용히 발길을 돌려 용인과 평택의 증설 버튼을 누른다면, 그 초라한 성적표와 손실은 과연 누구의 몫이 되겠는가. 그때도 정부나 외부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지역에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흥분이나 표를 의식한 소지역주의적 셈법이 아니다. 환영 현수막을 내리고 연도별 인프라 확충과 규제 해소를 담은 구체적인 '실행표'를 제시해야 한다. 지역 리더십과 주민 모두가 이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기업의 시계에 지역의 시간을 맞추겠다"는 과감한 타협과 결단에 나서야 할 때다. 스스로 내부 갈등을 끝내고 치밀한 준비와 실행력으로 정면 돌파하는 것만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호남의 새로운 100년으로 바꿀 유일한 열쇠다.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