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설교를 통해 요한복음의 ‘성전을 헐라’는 말씀 속 십자가, 회개, 부활과 새 성전 공동체의 복음을 묵상합니다.
엘 그레코가 그린 성전 정화의 장면에는 고요한
종교 공간을 찢고 들어오는 거룩한 긴장이 있다. 사람들은 성전 안에서 제물을 사고팔고, 돈을 바꾸며, 익숙한 질서처럼 하루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 서신 그리스도의 몸짓은 평온한 장면을 깨뜨린다. 그분의
분노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자리가 인간의 탐욕으로 더럽혀진 현실을 향한 심판이었다.
요한복음 2장의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바로 이 자리에서 들린다. 이 말씀은 단순히 돌로 지은 건물을 무너뜨리라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 아래 굳어 버린 권력, 경건의 외형 속에 숨어 있던 욕망,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세운 거짓 중심을 향한 복음의 칼날이었다. 성전은
무너져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곳이었기 때문에 흔들려야 했다.
장사하는
집이 된 성전 앞에서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
설교가 먼저 주목하는 지점은 예수님께서 왜 붙잡히셨는가
하는 질문이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이후
결박되어 안나스에게 끌려가신다. 겉으로는 종교 재판처럼 보였지만, 그
배후에는 성전을 둘러싼 부패한 이권과 권력 구조가 놓여 있었다. 예수님을 심문한 자들은 그분의 제자들과
교훈을 물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체제를 흔드는 말씀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유월절이 가까워지면 수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소와 양과 비둘기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성전 안의 제물 거래는 경건한 예배를 돕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까지 비싼 제물을 사도록 몰아가는 구조가 되어 있었다. 바깥에서 산 제물은 흠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되고, 결국 사람들은 성전 안에서 정해진 값을 치러야 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은혜의 자리를 시장으로 바꾼 종교적 탐욕에 대한 거룩한 항의였다. 그분이
엎으신 것은 단순한 상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마음 위에 얹힌 부당한 짐, 예배의 이름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구조, 거룩함을 이익으로 바꿔 버린
왜곡된 신앙 질서였다.
내 안에
세워진 보이지 않는 성전
그러나 이 말씀은 과거의 성전 권력만을 고발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성전처럼 떠받드는 것들이 있다. 돈과
권력, 체면과 전통, 종교적 자부심과 자기 의가 하나님보다
앞설 때, 그것은 신앙의 이름을 걸친 또 다른 우상이 된다. 아무리
거룩한 언어를 사용해도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면, 그 마음은 이미 장사하는 집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믿음은 그 거짓 성전을 더 단단하게 꾸미는
일이 아니다. 믿음은 주님 앞에서 무너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보는 회개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안나스와 무관한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의 유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까지 내 편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성경 묵상은 남의
죄를 분석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의 제단이 누구에게 바쳐져 있는지를 묻는 시간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헐고자 하신 타락한 중심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주님이 헐라 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새롭게
살리기 위함이다. 낡은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서만
은혜는 새 길을 낸다.
이것은 개인의 경건에만 머물지 않는다. 부부 사이의 완고한 자존심, 자녀를 향한 소유욕,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때로는 작은 성전이 된다. 겉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기준을 절대화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화해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주님은 바로 그 굳은 중심을 향해 “헐라”고 말씀하신다.
사흘
만에 다시 세워지는 복음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46년 동안 지은 건물을 떠올렸지만, 요한복음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 오해는 훗날
예수님을 죽이려는 거짓 증언의 명분이 되었고, 스데반을 향한 고발에서도 반복되었다.
여기에 복음의 깊은 신학적 통찰이 있다. 예수님은 성전을 단순히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이 가리키던 궁극의
실체를 자기 몸 안에서 완성하셨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몸이 찢기실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고, 부활 안에서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특정한 건물이나 계층의 특권에 갇히지 않는다. 죄인도, 가난한
자도, 병든 자도, 멀리 있던 이방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도 같은 빛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돌을 들었지만,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인에게 정죄가 아니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은혜와 진리의 길을 열어 주셨다. 주님은 율법을 무너뜨리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단순한 파괴의 언어가 아니다. 주님은 무너뜨리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다시 세우기 위해 오셨다. 다만 그분이 세우시는 새 성전은 인간의 탐욕과 자기
의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십자가의 순종, 사랑의 희생, 부활의 소망 위에서만 참된 예배가 시작된다.
새 성전
공동체로 부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성전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복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던 담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며, 둘로 하나를 만드시는 분이다. 성령 안에서 교회는 손으로 지은 건물보다
더 깊은 의미의 성전,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된다.
성령 강림 이후의 교회는 이 새 성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종과 여종,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이 같은 은혜 안으로 부름받는다. 인간이 만든 계급과
장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결정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사람을 배제하는 체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다시 하나 되게 하는 화해의 능력이다.
그러나 교회도 언제든 다시 장사하는 집이 될
수 있다. 제도가 복음을 대신하고, 전통이 사랑을 억압하며, 권력과 물질이 섬김보다 앞설 때 교회는 다시 낡은 성전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오늘의 교회와 성도에게도 현재형으로 들린다.
장재형 목사 설교의 힘은 이 말씀을 외부 비판으로만 돌리지 않는 데 있다.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먼저 한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내가
붙든 자기 의, 내가 내려놓지 못한 우월감, 내가 복음보다
소중히 여긴 안전한 자리들이 십자가 앞에서 무너질 때, 주님은 그 폐허 위에 새 성전을 세우신다.
성전이 헐리는 과정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예수님도 이 말씀 때문에 오해와 고발을 받으셨고, 스데반 역시 성전과
율법을 거스른다는 거짓 증언 속에서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충돌 속에서 더 선명해졌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죄와 위선으로 굳어진 세계는 평온하게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적용은 매우 구체적이다.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투명한 재정, 공정한 섬김,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세워 주는 질서가 필요하다. 성도는 자기 유익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지 않고, 교회는 세상 권력이나 자본의 논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새 성전 공동체는 크고 화려한 외형보다 십자가의 낮아짐을 통해 증명된다.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고 하셨지만, 그 끝은 폐허가 아니었다. 그 끝에는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시는
부활의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두려운 명령이면서 동시에 깊은 초대다. 내 안의 무엇이 아직도 주님의 채찍 앞에서 버티고 있는가. 나는
정말 그분이 다시 세우시는 새 성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그 질문 앞에 오래 머무는 자리에서, 우리의 신앙은 장식이 아니라 순종이 되고, 습관이 아니라 복음이
된다. 주님이 헐어 내시는 아픔을 피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의 한 돌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회는 다시 세상의 시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성전으로 서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