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빌립보서 3장 17절부터 4장 9절 설교를
따라 교회 갈등의 뿌리를 살피고, 십자가의 은혜와 주 안에서 같은 마음, 관용과 감사의 기도로 분열을 넘어 화해와 평강에 이르는 복음의 길을 깊이 묵상합니다.
한때 같은 복음을 위해 나란히 서 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상처의 다른 말로 부르기 시작하면, 공동체의 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번진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가 일깨우듯 관계의 위기는 상대를 살아 있는 ‘너’가 아니라 판단하고 밀어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순간 깊어진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빌립보서 3장 17절부터 4장 9절 설교는
바로 그 균열 앞에서, 교회 갈등을 화해로 돌리는 길이 인간적인 기술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회복하는
데 있음을 밝힌다.
빌립보 교회에는 기쁨과 동역의 아름다운 기억이
있었지만,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불화도 존재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작게 여기지도, 한쪽을 쉽게 정죄하지도 않았다. 그는
십자가 중심의 삶과 하늘 시민권, 주 안에서 같은 마음, 관용과
기도, 바른 생각과 실천을 하나의 흐름으로 제시한다. 갈등의
표면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무너뜨리는 마음의 뿌리부터 복음 앞에 세운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갈등의 크기가 달라질 때
바울은 먼저
“나를 본받으라”고 권한다. 이 말은 자신의
완전함을 자랑하는 선언이 아니라, 자신이 따르는 그리스도를 함께 바라보자는 초대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복음을 놓지 않았고,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교리를 설명하는 말보다 먼저,
십자가를 따라 사는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실제의 본이 되었다.
이어지는 경고는 더욱 날카롭다. 바울은 자기 욕망과 이익을 앞세우며 땅의 일만 생각하는 태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와 연결한다. 교회 갈등도 겉으로는 신념과
원칙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 이기고
싶은 마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집착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분쟁 해결의 출발점을 상대의 허물을 계산하는 데 두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회개하는 데 둔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가 더 옳은가보다 내가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가 먼저 드러난다. 내 주장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실상은 자존심을 지키려
한 것은 아닌지, 공동체의 유익을 말하면서도 내 편을 늘리려 한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복음은 상대를 먼저 꺾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이 공동체의
사랑보다 커진 지점을 먼저 보게 한다.
바울은 곧 성도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말하고,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게 한다. 영원을
바라보는 믿음은 오늘의 상처를 하찮게 여기지 않지만,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눈앞의 승패가 전부가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다. 교회가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이유는 모두가 성숙해서가 아니라, 모두보다
크신 하나님의 미래를 함께 바라보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은혜
바울은 갈등을 말하기 전에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부른다. 책망보다 먼저 사랑의 호명이 놓인다. 이는 문제를 덮기 위한 부드러운 수사가 아니라, 갈등 때문에 잊힌
공동체의 본래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목회적 언어다. 사람은 정죄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지만, 진실한 사랑 안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용기를 얻는다.
그 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름을 각각
부르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한다. 그는 어느 한쪽의 편에 서서 다른 사람을 몰아세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갈등을 모호하게 처리하지도 않는다. 두 사람의 시선을 각자의 주장보다 더 깊은 공통의 자리, 곧 “주 안에서”로 돌려놓는다.
같은 마음은 의견의 차이를 없애는 획일성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 크게 바라봄으로써, 자기
생각을 공동체의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는 복음의 일치다. 화해는 상대의 목소리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서로의 이름을 다시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읽는 일이다.
바울은 또한
“멍에를 같이한 자”에게 두 사람을 도우라고 요청한다. 갈등을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방치하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짐을 지도록 한 것이다. 중재자는 소문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양쪽의 말을 듣고, 관용과
기도로 대화의 자리를 열며, 다시 복음 안에 설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한다. 갈등 해결은 구경꾼의 평가가 아니라 공동체적 사랑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더욱 깊은 울림은 바울이 두 여인을 과거에
자신과 함께 복음에 힘썼던 동역자로 기억하고,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 현재의 불화가 그들의 전부가 아니며, 상처가 그들의 궁극적 정체성을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화해의 문은 닫히지만, 같은 은혜로 구원받고 같은 소망을 향해 걷는 존재임을 기억하면 미움은 영원히 지속할 명분을 잃는다.
관용과
감사의 기도가 마음의 문을 열 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권면은 갈등을 모른 척하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 자신이 감옥에 있고 교회 안에도 불화가 있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이기에, 이 기쁨은 문제가 사라졌을 때 느끼는 가벼운 감정과 다르다. 하늘 시민권과 부활 소망에 뿌리내린 기쁨은 갈등이 공동체의 정체성 전체를 삼키지 못하게 한다. 복음의 기쁨을 잃으면 상대의 말 한마디가 마음의 주인이 되지만, 주
안에서 기쁨을 회복하면 갈등은 치유되어야 할 한 부분으로 돌아온다.
이어지는 관용은 무기력한 양보나 무원칙한 침묵이
아니다. 부당함을 느낄 때 곧바로 보복하고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충동을 넘어, 온유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게 선을 선택하는 힘이다.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씀은 화해가 교회 안의 조용한 합의에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가 세상 앞에 드러내야 할
복음의 성품임을 보여 준다.
갈등이 깊어지면 마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두려워한다. 상대의 말을 되풀이해 해석하고, 마음속에서
끝없는 재판을 열며, 관계의 미래를 가장 어두운 방향으로 예측한다. 바울은
그 염려를 기도와 간구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한다. 염려의
반대는 무감각이 아니라,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로 드리는 기도다.
그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 평강은 갈등이 모두 해결된 뒤에 받는 보상이 아니라,
아직 풀리지 않은 관계 속에서도 성도의 내면을 지켜 주는 은혜다. 마음이 평강에 붙들릴
때 우리는 분노가 시키는 대로 말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악의로만 해석하지 않으며, 순종해야 할 다음 한 걸음을 분별할 수 있다. 관계의 회복은 먼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바른
생각이 화해를 삶으로 옮길 때
바울은 마지막으로 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고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권한다. 갈등은 사건이 지나간 뒤에도 생각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상대의 한마디에 의도를 덧붙이고, 지나간 장면을 반복해 재판하며, 한 사람의 가장 나쁜 순간을 그의 전부로 단정한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미움이 내면의 유일한 해설자가 되지 못하도록 마음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성경 묵상이다.
참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할 만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 안에 남아 있는 은혜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
것이다. 잘못을 분명히 보면서도 한 사람을 그의 실수와 동일시하지 않는 태도에는 깊은 신학적 통찰이
있다. 우리 역시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판단의 언어는 낮아지고 회개의 문은 열린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에서 멈추지 않는다.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한다. 화해는 좋은 문장을 이해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먼저 연락하고, 충분히 듣고, 자신의 몫을 인정하고, 공동체가 함께 짐을 지며, 기도와 감사의 습관을 실제 삶으로 옮겨야
한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비추는 복음의 길도 결국 말과
삶이 하나 되는 순종으로 향한다.
교회는 갈등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십자가로 용서받은 이들이 다시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공동체다. 갈등은
공동체의 실패를 드러낼 수 있지만, 그것을 복음 앞에 가져올 때 오히려 은혜와 사랑이 실제로 무엇인지
보여 주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바울이 약속한 것은 단순히 문제가 사라지는 평온이 아니라, 배우고 행하는 공동체와 함께하시는 “평강의 하나님”이다.
지금 내 마음에서 이미 적으로 굳어 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그 사람이 변하기를 기도하면서도, 정작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할 나의 자존심과 욕망은 붙들고 있지 않은가. 화해의 첫걸음은 누가 먼저 사과해야 하는지를
계산하는 데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주 안에 있고 생명책에 함께 기록된 존재임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 나는 상처의 이름으로 부르던 그 사람을, 다시 사랑받는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