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주기도문 설교를 따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은혜를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하는 세 간구가 어떻게 익숙한
암송을 넘어 회개와 사랑, 일상의 순종으로 이어지는지 살피며 기도하는 삶의 방향을 돌아봅니다.
밀레의 〈만종〉에서 흙을 일구던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자, 밭 한가운데 기도의 고요가 내려앉는다. 곁에
놓인 농기구와 남겨진 일거리는 기도가 일상을 떠나는 시간이 아니라, 일상의 방향을 돌아보는 시간일 수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장재형목사(미국 Olivet University 설립)의 주기도문 설교도 익숙한 암송을
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의 나라와 뜻을 따라 사는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말까지 막힘없이 외웠지만,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염려에 붙들려 있을 때가 있다. 문장을
기억하는 일과 그 문장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일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하는 세 간구를 통해, 기도하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주기도문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기도의 뜻을 설명할 수 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뜻에 자신의 하루를 비추어 보는 일이다.
거룩
앞에 멈출 때, 사랑은 더 깊어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고백은 지친 마음을 쉬게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내 욕망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호의로만 받아들이면, 위로를 얻으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놓칠 수 있다. 설교는
요한일서 4장 8절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거룩을 바라보게 한다. 사랑은 거룩을 덜어 낸 자리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온전히 이해된다.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었던 장면은
그 관계의 문턱을 보여준다. 출애굽기 3장 5절의 명령 앞에서 그는 자신의 익숙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대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욕망에 갇히지 않는 창조주이시며, 지으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다. 경배와 감사는 그분의 힘에 눌려 마지못해 바치는 대가가 아니라, 피조물이
자신을 지으신 분 앞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는 응답이다.
그렇다고 거룩을 안다는 것이 두려움 속에 멀찍이
서 있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부르시고,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분이기도 하다. 그 기다리심을 무능함으로 오해해서도
안 되지만, 전능하심을 사랑 없는 강요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거룩
없는 사랑은 방종으로 흐르고, 사랑 없는 거룩은 형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설교의 경계는 이 두 극단을
함께 비춘다.
이 거룩과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막연한 위안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설교가 로마서 1장의 죄와 심판을 함께 돌아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구원의 은혜는
죄의 무게를 지워 얻는 가벼운 안심이 아니라, 심판의 엄중함을 알면서도 예수님 안에서 건짐받는 생명의
복음이다.
아버지라
부르는 순간, 은혜가 기도의 문을 연다
주기도문의 첫머리는 높이 계신 하나님과 가까이
계신 아버지를 함께 부른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고백에는
경외가, ‘우리 아버지’라는 부름에는 친밀함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 부름에 참여한다.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은혜는 하나님의 거룩을 잊게 하는 허락이 아니라, 그 거룩 앞에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관계를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만남으로 풀어낸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장차 온전히 알게 되리라는 소망은, 신앙의 깊이가 지식의 양만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일깨운다. 기도로 마음을 열고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에 관해
아는 일은 하나님과 사귀는 삶으로 깊어진다. 의무를 채우려는 마음만으로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성찰도 여기서 시작된다.
이 사귐은 특별한 장소와 시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루를 시작할 때와 길을 걸을 때, 식탁 앞과 잠들기
전에도 아버지께 마음을 열 수 있다. 어떤 응답은 곧 나타나고 어떤 응답은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설교는 하나님께서 선한 때와 방식으로 응답하신다는 신뢰를 붙든다. 결과를
빨리 얻기 위해 마음을 다그치기보다, 내 염려를 들으시는 분께 삶을 맡기는 것이다.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스며든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처럼, 받은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께는 마음을 열면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닫고 있다면, 기도 속의 친밀함이 관계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야 한다. 아버지께
사랑받는 기쁨이 이웃에게도 전해질 때, 믿음은 혼자 간직한 위안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이름을 품고, 나라의 소망을 살아가다
이제 주기도문은 우리가 바라는 삶의 중심을
새롭게 세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인격과 권위를 존중한다는 고백이다. 입술로 그 이름을 높이면서 행동으로는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기도는
자연스럽게 회개의 자리로 이어진다. 예배에서 드린 존경이 일상의 말과 태도에도 담겨 있는지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설교는 다툼과 분열, 부정한 행위가 신앙인의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 때문에 그분의 이름까지 조롱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기도는 다른 사람의 불경함을 지적하기에 앞서, 나의 삶이 어떤 증언이 되고 있는지 살피게 한다. 내가 옳다는 확신보다 그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앞설 때, 함부로
내뱉던 말에도 멈춤이 생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간구는
소망의 지평을 더 넓힌다. 이 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 뒤에만 기다리는 세계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동시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온전히 이루어질 나라를 기다리는 소망이기도 하다. 이미 임한 나라를 믿기에 오늘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불완전한 현실 앞에서도 기다림을 놓지 않는다.
마태복음 4장 17절의 회개 선포를 따라 그 나라를 바라보면, 기다림은 막연한 기대에
머물 수 없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면서 내 삶만큼은 내 욕망의 지배 아래 남겨 두려는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재물과 명예, 인간관계가 나를 붙잡는 주인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라를 구하는 기도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바람에서, 이미 주어진 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 묻는 자리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기도가
끝난 자리에서 순종의 하루가 시작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에 이르면, 기도는 발 딛고 선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본다. 죄와 고통, 불의가 있는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펼쳐지기를
구하는 것은 그 뜻을 실천하려는 태도와 떨어질 수 없다. 이 설교가 말하는 소망은 세상에서 달아날 이유가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이유가 된다. 하늘을
바라보는 믿음은 땅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삶을 인간의 결심에만
맡기지 않는다. 로마서 8장 26절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연약함 속에서도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심을 일깨운다. 기도가 막히는 날에는 자신의 부족함만 들여다보기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 다시 마음을 열 수 있다. 주기도문을 거듭 묵상하는 일은 완벽한 기도자가 되려는
훈련이 아니라, 연약한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다시 맞추는 일이다.
그 방향이 분명해지면 삶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재물과 명예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붙들어야 할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자 그분의 나라를 위해 쓰일 재료가 된다. 안식 또한 모든 염려가 사라진 뒤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계획 아래 살아가며 마침내 그분께 돌아간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내 삶을 혼자 지탱해야 한다는 불안 대신,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가는
신뢰가 자리 잡는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면 같은 일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한 사람에게 그 일상은 더 이상 기도와 무관한
시간이 아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말 뒤에는 아직 살아내지 않은 하루가 놓여 있다. 오늘 내 입술이 아버지라 부른 분을, 내 말과 선택과 사랑도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