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을 다시 보라…‘자원국’ 아닌 K산업의 유라시아 플랫폼

한·카자흐스탄 82건·191.9억달러 프로젝트…핵심광물·AI·원전·물류로 협력 확장

한국 기업, 자동차 수출에 머물면 기회 놓쳐…“자원 확보→소재→제조→유라시아 진출” 전략 필요

한국 기업의 카자흐스탄 진출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카자흐스탄은 한국 기업에 자동차와 에너지, 자원 중심의 시장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최근 양국 경제협력의 무게중심이 핵심광물과 첨단산업, 인공지능(AI), 에너지, 물류 인프라 등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특히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린 한·카자흐스탄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는 82건의 상업문서가 총 191억9000만달러 규모로 체결됐다. 단순한 교역 확대를 넘어 현지 생산과 디지털 인프라, 자동차 부품, 드론 등 산업 프로젝트로 협력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국 정부도 중앙아시아와의 첫 정상회의를 계기로 핵심광물 공급망과 제조 AI 협력을 주요 의제로 끌어올렸다. 카자흐스탄과는 원자력 에너지와 핵심광물 분야 협력도 확대하기로 했다. 문제는 한국 기업이 이 변화를 얼마나 빠르게 사업기회로 연결하느냐다.

 

자동차 다음은 무엇인가

카자흐스탄에서 한국 기업의 존재감은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뚜렷하다. 실제 양국 간 협력도 자동차 부품 현지화와 기아 생산기지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이제 자동차만 바라봐서는 카자흐스탄 시장의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경제를 자원 의존형 구조에서 보다 다각화된 산업구조로 전환하고 있다. 세계은행도 2026~2031년 카자흐스탄 협력전략에서 교통·디지털 연결성 강화, 천연자원 관리, 민간부문 성장과 경제 다변화를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 변화가 기회다. 카자흐스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원 자체를 팔아주는 기업만이 아니라 자원을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술과 자본이기 때문이다.

 

‘광물 확보’에서 끝나면 반쪽짜리 협력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분야는 핵심광물이다. 카자흐스탄은 우라늄을 비롯해 구리와 크롬 등 다양한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과의 협력에서도 리튬과 희소금속 등 핵심광물이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한국 정부가 제시한 방향도 단순 수입이 아니다. 탐사부터 정제·가공, 고부가가치 소재 생산까지 이어지는 핵심광물 밸류체인 전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 기업의 전략이 달라져야 한다. 광산 지분을 확보하거나 광물을 장기 구매하는 것만으로는 공급망 경쟁에서 충분한 차별성을 만들기 어렵다. 카자흐스탄의 자원에 한국의 소재·정제·공정·AI 기술을 결합해 현지에서 부가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자원 확보가 출발점이라면 소재와 제조가 본게임인 셈이다.

 

AI도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산업 키워드

AI 분야 역시 예상보다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최근 한·카자흐스탄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카자흐스탄의 국가 AI 생태계와 디지털 인프라 구축이 논의됐으며, 한국 기업과의 협력 프로젝트도 자동차 부품, 의료기기뿐 아니라 드론 등 첨단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이는 한국 기업에 중요한 신호다. 카자흐스탄의 AI 시장에 단순히 소프트웨어를 수출하는 것보다 AI+제조, AI+물류, AI+에너지, AI+우주·항공, AI+방산​처럼 기존 산업과 결합하는 전략이 더 큰 사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제조업 자동화와 산업용 로봇, 무인체계, 센서와 데이터 처리 기술은 한국 기업이 카자흐스탄의 산업 고도화 과정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다.

 

 

카자흐스탄의 진짜 무기는 ‘지도’에 있다

카자흐스탄을 단순한 내수시장으로 보면 사업 규모는 제한적이다. 하지만 지도를 펼쳐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카스피해를 거쳐 유럽으로 연결되는 유라시아 물류축의 핵심에 위치한다. 특히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트랜스카스피해 국제운송로, 이른바 ‘중간회랑(Middle Corridor)’​이 빠르게 개발되고 있다. 세계은행은 올해 카자흐스탄 구간 철도 연결사업에 8억4600만달러의 보증을 제공해 14억1000만달러 규모의 장기 상업금융을 동원하기로 했다. 이 사업을 통해 2030년까지 화물 운송량을 세 배로 늘리고 운송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중간회랑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질 경우 2040년까지 교역량이 세 배 이상 증가하고, 관련 지역에서 200만개의 일자리가 추가될 가능성도 제시했다. 한국 기업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생산한 제품을 중앙아시아에 판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중앙아시아·카스피해·유럽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공급망에 올라타는 전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주·항공·방산까지 확장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우주·항공·방산 분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자흐스탄은 광대한 영토와 우주산업 인프라를 갖고 있고, 한국은 위성·발사체·센서·AI·무인체계·첨단소재 등에서 산업 기반을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 방산을 별도의 산업으로 볼 것이 아니라 AI, 로봇, 드론, 센서, 위성, 정밀기계와 결합하면 새로운 협력 모델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핵심광물 → 첨단소재 → 정밀제조 → AI·로봇 → 드론·무인체계 → 우주·항공·방산 으로 이어지는 산업 밸류체인이다. 이는 단순한 제품 수출보다 훨씬 긴 호흡의 사업이다. 동시에 카자흐스탄이 추진하는 산업 고도화와 한국 기업의 기술 경쟁력을 결합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191억달러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남기느냐’

이번 한·카자흐스탄 협력에서 191억9000만달러라는 숫자는 눈길을 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계약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 그 돈이 카자흐스탄에 어떤 산업생태계를 만들고 한국 기업에 어떤 지속적인 시장을 남기느냐다. 한국 기업이 단순 EPC 사업이나 제품 판매에 머물 경우 일회성 실적에 그칠 수 있다. 반대로 현지 생산과 기술이전, 공동 연구개발, 소재·부품 현지화, 인력 양성, 주변국 수출까지 연결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카자흐스탄을 ‘판매시장’이 아니라 ‘공동생산기지이자 유라시아 진출 플랫폼’​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미국·중국에 이어 ‘중앙아시아’를 보는 기업이 필요하다

한국 기업의 해외 전략은 그동안 미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에 상대적으로 집중돼 왔다. 그러나 공급망이 재편되고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면서 새로운 생산거점과 자원 공급망을 확보하는 일이 기업의 생존전략이 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이 과정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풍부한 자원, 넓은 국토, 에너지와 물류 인프라,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 산업 다변화 정책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지 제도와 행정절차, 환율과 금융, 인프라, 전문인력 확보 등 실제 사업 과정에서 검토해야 할 변수도 적지 않다. 따라서 정부 간 협력 문서를 기업의 실제 투자와 수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후속 전략이 중요하다.

 

이제 질문은 ‘카자흐스탄에 무엇을 팔 것인가’가 아니다

한국 기업이 던져야 할 질문은 달라졌다. “카자흐스탄에서 무엇을 함께 만들 것인가.”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카자흐스탄을 통해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핵심광물 확보에서 시작해 첨단소재와 제조업으로 연결하고, AI·로봇·우주·항공·방산으로 확장한 뒤 중앙아시아와 유럽시장까지 연결하는 것. 이것이 가능하다면 카자흐스탄은 더 이상 ‘중앙아시아의 자원국’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 기업에게 카자흐스탄은 자원을 확보하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 밸류체인을 만드는 곳, 그리고 유라시아 시장으로 나가는 새로운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카자흐스탄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관심을 사업으로 바꾸는 기업의 실행력이다.

작성 2026.10.05 23:46 수정 2026.10.0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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