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정유순] 변산에서 허균과 유형원을 만나다

▲ 정유순/ 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한국공공정책신문

 [한국공공정책신문=최진실 기자]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변산마실길 해안 길 안쪽으로 있는 우반동계곡(愚磻洞溪谷)에 들어서는 순간 평등 세상을 꿈꿔왔던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許筠)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제시했던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저자이며 실학계의 비조(鼻祖)인 반계 류형원(磻溪 柳馨遠)의 숨결이 느껴진다.


허균(許筠, 1569∼1618)의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다. 1569년 초당 허엽(許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8년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刑曹正郞)을,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전적(典籍)·수안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허균은 주자학(성리학)의 허구성을 비판하였고 예학(禮學)이 중심이 된 왜곡된 학문을 개혁하고 민중을 위한 실용적 학문으로 조선 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시문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불교에도 심취하였다. 허균은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 시인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으로 소설<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이 있다.

 

비가 와야 물이 떨어진다는 60m 높이의 선계폭포(仙溪瀑布)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모습이 물소리의 위용을 짐작케 한다.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파직당한 후 유배지를 전라도 함열(咸悅)로 정하고 부안으로 내려와 시와 가무에 있어서 황진이와 쌍벽을 이뤘던 서녀(庶女) 출신 이매창(李梅窓)과 교유를 했고, 선계폭포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있는 정사암(靜思菴)에 머물며 홍길동전을 썼다고 전한다.

 

부조리한 세상을 한탄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허균에게 이매창은 사상과 우정을 나누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동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이매창의 이상향(理想鄕)을 홍길동전을 통해 표출 했을지도 모른다. 정사암이 위치한 우반동 일대가 홍길동전에서 묘사한 지형과 지명이 비슷하게 나오는 것도 그렇고, 도적들의 은거지인 굴바위와 율도국으로 전해오는 위도(蝟島)가 부안 땅이라 그런 생각을 더 깊게 한다.

 

허균은 신분적 한계로 인해 불운한 삶을 살고 있던 서자(庶子)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요즈음 같으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기생과 정신적인 교감을 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의 절친 기생 이매창이 죽자,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妙句堪擒錦)/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淸歌解駐雲)/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偸桃來下界)/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竊藥去人群)…”라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우동제(저수지)를 지나 대불사 앞으로 숲을 이룬 시누대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를 따라 조금 가파르게 올라가니 굴바위가 시원한 바람을 내 품는다. 굴바위는 남옥녀봉의 남사면 중턱에 있는 깊은 동굴이다. 오래전 굴바위에는 ‘참샘’이라 불리던 샘이 있었다. 복지깨(밥그릇 뚜껑의 방언)로 참샘의 약수를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하였고, 특히 한센병에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당시, 줄포에 사는 일본인이 복지깨를 가져가 버린 후 참샘의 약효도 사라졌다고 한다.

 

허균의 호가 교산(蛟山)이다.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한다. 허균의 호인 교산은 그가 태어난 강릉의 사천진해수욕장 앞에 있는 야트막한 산 이름인데, 산의 형상이 꾸불꾸불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허균운 서자들과도 교류하면서 홍길동전과 같은 꿈을 꾸었는지 모르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나고 만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허균은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다고 하며,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는 것이다.

 

이곳 우반동에서 허균 말고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반계 류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이다. 유형원은 원래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정랑(正郞)을 지냈고 아버지는 검열(檢閱)을 지냈으나 그가 두 살 때 아버지는 죽고 북인 계열인 할아버지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몰락했다. 15살 때 병자호란을 만나 가족과 함께 원주로 피난길을 떠났다가 피난 생활이 끝나자 그의 할아버지는 정계와 발을 끊고 부안으로 낙향했다.

 

반계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의 현실을 몸소 보고 겪은 후 1653년(효종 4)에 조부가 터를 닦아놓은 이곳으로 낙향, 우반동 송대 밑 대숲에 자리 잡은 집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만 권의 책에 묻혀 평생 야인으로 지내며 학문에 전념했다. 이후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파탄 난 나라를 보며 학문과 현실에 관심을 두었다. 여러 번 과거 시험을 보기도 했고 진사까지는 따냈지만 막상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평생 자신을 수양하는 위기학문(爲己學問) 연구에만 힘을 썼다.

 

당색으로는 북인에 가까웠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거물급 인사와 연줄이 있었다. 유형원의 스승이자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인 김세렴(金世濂)은 벼슬길에 올라 각각 호조판서와 병조참의까지 지냈고 유형원의 스승 허목(許穆)도 벼슬길에 오른 후 우의정에 올랐다. 유형원의 스승과 지인들은 지속적으로 관직에 천거했지만 그는 계속 사양했다. 본인이 벼슬길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거부하고 재야에 파묻혀 살았던 것이다.

 

조부가 사망한 뒤 32살 되던 1653년(효종 4) 조상의 땅인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에 집을 짓고 칩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1656년(효종 7)에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라는 지리서를 집필했고, 가끔씩 한양이나 영남 지방 유랑도 하며 전국의 토지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1652년(효종 3)부터 1670년(현종 11)까지 무려 19년에 걸쳐 <반계수록>을 완성하고 3년이 지나 1673년(현종 14)에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일생동안 재야의 사림으로 학문에 전념하면서 내놓은 필생의 역작이었으나, 벼슬길을 마다했기 때문에 절친한 동료들이 <반계수록>의 내용에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그 내용이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반계수록(磻溪隧錄)>에 담긴 그의 개혁 사상은 특히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균전론(均田論)과 경자유전(耕者有田)은 토지개혁의 핵심 원칙으로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대에 들어와 높이 평가받아 수원 화성 축성에 밑거름이 되었다.

 

우반동계곡과 반계서당을 둘러보고 발걸음은 서해안을 따라 북으로 옮기는데, 홍길동전을 통해 새로운 평등 세상을 꿈꿔왔던 허균의 이상향이 이곳 우반동계곡에서 때를 기다리고, 반계수록에 명시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통해 농촌을 부(富)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그의 여러 가지 주장은 뒷날 많은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열매는 영글어 전국으로 퍼져 나갈 날만 기다린다.


▲반계서당(필자 정유순 제공) ⓒ한국공공정책신문




瓦也 정유순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저서 <정유순의 세상걷기>, 

    <강 따라 물 따라>(신간) 등



작성 2025.09.29 10:08 수정 2025.09.2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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