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연휴 동안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3박 4일 일정으로 교회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여러 팀 가운데 한 팀을 맡아 15명의 팀원들과 정해진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팀장으로 맡은 일이 있다 보니, 이 기간동안 일에 집중했습니다. 팀원들과 손발이 맞아가는 게 느껴졌고, 맡은 역할을 잘 해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가 끝날 무렵부터 아내의 말투와 표정이 조금씩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더군요. 돌이켜보니 그제야 아내와 아이들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보았던 부부상담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사연 자체는 우리 이야기와 거리가 있었지만, TV 속 남편에게 건네는 상담의 솔루션에 아내는 맞장구를 쳤습니다. "남편의 우선순위에서 아내와 가정이 밀려나 있다고 느낄 때, 아내는 가장 큰 서운함을 느낀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있었던 걸까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수고했어. 고생 많았어.’ 이 한 마디가 그렇게 듣고 싶더군요. 사실 세상 누구보다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큰 편입니다. 한 집에서 부대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아내이기 때문이죠.
근데 올라오는 차 편 뿐 아니라 집에서도 속상한 마음이 가시질 않나 봅니다. 그러다 갑자기 저녁 6시에 저녁을 차리라 하네요. 단호합니다. 10여년 넘는 결혼생활을 통해 겪은 바,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합니다. 몸이 피곤하니 나가서 먹자거나, 차리기 싫다고 하면 최소 2주 간의 냉전이 시작될거라는걸요.
평소 식사는 아내가 많이 차립니다. 아마 이번에는 피곤한 상태에서 밥을 차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오빠도 한번 겪어보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밥을 앉히고, 계란후라이를 부치고, 생당근을 썰고, 김과 냉장고 속 반찬들을 꺼내 식탁을 차렸습니다. 대단한 저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집에서 흔히 먹는 평범한 한 끼였습니다.
밥을 먹다가 문득, 예전에 제가 미리 써본 묘비명 중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아내가 인정하는 남편으로 살았다.’그때는 꽤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보니, 그 말이 훨씬 어렵게 다가옵니다.
어쩌면 아내가 힘들 때 함께 힘들어하고, 아내의 수고를 알아주고, 내가 바쁠 때에도 가족이 나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 그런 날들이 하나둘 쌓여야 비로소 가능한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직 제 묘비명은 완성되지 않은 듯 합니다.
오늘 하루, 곁에 있는 배우자를 향해 조금 더 넓은 품을 내어주는 시원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