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배경음악도 흐르지 않는다. 4:3의 화면비와 채도가 낮은 무채색의 영상은 건조함을 넘어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여기에 제목이 가리키는 '검사'라는 직업의 무게와 웃음이나 유머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의 무뚝뚝한 표정이 더해지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진다. 검사가 찾아가는 감옥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비좁은 계단과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실내 공간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숨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이러한 분위기는 관객의 호흡마저 조금씩 죄어온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감독의 철저한 계산 아래 이루어진 연출이다. 세르히 로즈니차가 보여주려는 세계는 단순히 어두운 시대의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마저 사라진 사회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스탈린의 서슬 퍼런 대숙청의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거대한 실험이었다. 혁명을 이끈 레닌은 1924년 사망했지만,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목하지 않았다. 이후 볼셰비키 지도부 내부에서는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스탈린이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권력을 장악한다. 한때 혁명을 함께 이끌었던 동지들은 반혁명 분자라는 이름으로 숙청되었다. 혁명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가 오히려 혁명의 주역들을 제거하는 역설이 시작된 것이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이어진 대숙청은 그 정점이었다. 당시 NKVD를 중심으로 약 160만 명이 체포되었고, 약 68만 명이 처형되었다. 희생자는 정치적 반대파나 당내 지도자에 국한되지 않았다. 군인과 지식인, 노동자와 농민, 평범한 시민들까지 국가가 만들어낸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혁명의 순수한 신념을 간직한 한 검사의 이틀을 따라간다.
검사의 이름은 알렉산드르 코르네프다. 법학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검사로, 전임자의 부재와 대학 할당제로 지방 검찰청에 배치되었다. 어느 날 그에게 피로 쓴 쪽지 한 장이 전달된다. 검찰 내부의 중요한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쪽지를 작성한 사람은 스테프냐크라는 수감자다. 코르네프가 이 쪽지를 쓴 스테프냐크를 찾아간 이유는 코르네프가 대학 시절 그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만난 스테프냐크는 브랸스크 지역의 비밀경찰 조직인 NKVD가 파시스트들에게 장악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신과 같은 무고한 혁명 동지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으며, 거짓 자백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모스크바의 스탈린과 예조프,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같은 최고 지도부에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코르네프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혁명의 적들이 국가 내부에 침투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이를 바로잡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야간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한다. 찾아간 곳은 소련 검찰의 최고 책임자인 검찰총장 비신스키의 집무실이다. 비신스키는 코르네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다. 그의 말을 중간에 끊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위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코르네프가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수사 지원을 약속하며 돌아가는 열차표까지 마련해준다. 코르네프는 자신의 고발이 마침내 정의로운 결실을 볼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에서 가장 서늘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코르네프는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스테프냐크가 고발한 NKVD의 폭력은 일부 타락한 관리들의 일탈이 아니었다. 스탈린의 권력 유지와 체제 운영을 위해 조직적으로 수행된 국가의 폭력이었다. 당시 NKVD를 이끌었던 예조프는 대숙청의 실무를 지휘한 핵심 인물이었다. 검찰총장 비신스키 역시 공개재판에서 조작된 혐의와 자백을 토대로 혁명 원로들을 반역자로 몰아가는 데 앞장섰다. 코르네프가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찾아간 인물이 이미 그 정의를 파괴하는 데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코르네프가 믿었던 것은 국가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국가 내부의 정의였다. 그는 국가와 혁명을 구분하지 못했다. 혁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일부 인물들이 혁명의 정신을 배반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인물들을 제거하고 원래의 혁명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문제는 몇몇 인물의 부패가 아니었다. 국가의 작동 방식 자체가 이미 폭력으로 변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설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을 떠올리게 한다. 1945년 발표된 이 작품에서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상징하는 인물로 읽힌다. 나폴레옹은 어린 강아지 아홉 마리를 어미에게서 떼어내 자신에게 충성하는 개들로 길러낸다. 이 개들은 나중에 스노볼을 축출하고 나폴레옹의 권력을 지키는 충실한 경호대가 된다. 혁명의 이상을 이야기하던 동물농장은 어느새 권력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회로 바뀌어버린다. 영화의 NKVD 역시 이 개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 권력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며 체제를 유지하는 폭력의 도구다. 하지만 <동물농장>과 <두 검사>가 보여주는 비극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자신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경험한다. 반면 코르네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이미 무너졌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혁명을 믿고, 당을 믿고, 법을 믿는다. 자신의 신념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이와 관련해 감독이 전한 말이 인상적이다.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어리석었던 것이라 아니라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을 뿐이다." 이 말은 영화의 주인공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코르네프의 행동은 답답할 정도로 순진하다. 스탈린과 그 측근들에게 고발장을 전달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그의 태도는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정보는 통제되었고, 의심은 범죄가 되었으며, 진실을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가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상황은 낯설지 않다. 1905년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 사건은 가폰 신부가 이끄는 노동자들이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노동조건 개선과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군대의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당시 노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차르를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존재로 여겼다. 자신들의 삶이 비참한 이유가 차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제국의 통치구도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독립혁명 역시 처음부터 독립을 목표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한동안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청원했다. 토머스 페인의 <상식>이 1776년 발표되어 독립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설득하기 전까지도 식민지 내부에는 영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이 존재했다. 역사적 변혁은 언제나 처음부터 명확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어온 세계의 질서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그 질서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동물농장>의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나폴레옹의 폭정에 순응하면서 자신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농장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를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돌린다. 성실하게 일하던 복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더 열심히 일했어야 한다고 자책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 장면은 <두 검사>의 코르네프와 겹친다. 두 인물 모두 자신이 믿는 체제의 모순을 체제 내부의 문제로만 이해한다. 그리고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